시리즈로 돌아가기
12화: 일상 5


  • 파이널 판타지 14 효월의 종언까지의 네타가 있습니다.
    효월의 종언 엔딩까지의 내용과 칠흑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 빛의 전사의 호칭은 '모험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의 전사의 묘사는 크게 하지 않지만, 제 캐릭터를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여성 모험가, 주 직업은 음유시인 이라는 설정으로 읽으시는 게 편하실 수 있습니다.
  • 여러모로 게임 내 설정, 캐릭터 설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날조 설정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모험가의 메타 발언, 캐릭터들의 게임 용어 사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22.08.29 포스타입에 업로드 했던 글)








영웅과 동료들이 돌아왔다. 아득히 먼 우주에 향했던 그들은 종말과 싸워 이기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세상엔 내일이 찾아오게 되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희생된 사람들과 망가진 터전을 보며 슬퍼하면서도 나아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영웅과 동료들의 노력으로 평소와는 다르지만, 새로운 미래의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그런 새로운 미래의 어느 날의 이야기. 미래를 가져온 영웅과 그 동료들의 어느 하루를 적은 일상의 기록이다.








하늘은 맑았다. 새하얀 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일부분 가리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맑은 하늘의 밝은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방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붉은 털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무언가를 옮기기도 하고, 어딘가에 넣어 정리하기도 했다. 방 안에 있는 미코테 남성은 누가봐도 짐을 정리하는 일에 집중해 있었다. 자신이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대답이 없었기에 문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사람이 있는게 뻔히 보였지만, 답이 없었던 일에 찾아온 손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문틀에 살짝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붉은머리 미코테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집중하면 주위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책을 읽을 때 또한 그래서 뚫어져라 쳐다봤던 일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고 쳐다볼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남성을 찾아온 사람, 모험가는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그라하 티아."


이름이 불리자 그라하 티아는 깜짝 놀란듯 귀를 움직이고는 몸을 돌려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문틀에 기대고 있는 모험가의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 막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모험가의 성격상 아무래도 지켜보고 있다가 이름을 불렀을 거라는 걸 그라하 티아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라하 티아가 약간 곤란한 듯,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짓자 모험가는 그제야 기대고 있는 문틀에서 몸을 떼어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바빠보이네?"

"있었으면 부르지 그랬어."

"노크했는데도 모르더라. 그라하는 하나에 집중하면 아무것도 안보이는 편인가봐, 책 읽을 때도 그랬고."

"부정은 못하겠지만, 언제부터 보고있었던거야?"

"그건, 비밀."


언젠가를 흉내내는 듯 모험가는 부드럽게 웃으며 검지만 펼친 오른손을 천천히 입술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어쩐지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그라하 티아를 보며 모험가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도 저 모습을 보아하니 짐 정리하는 모습을 잠깐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니란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금방왔다고 말을 할 사람이었다.


모험가가 좀 더 걸어와 그라하 티아의 옆에 서서 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정리하고 있는 짐가방은 예상외로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이것저것 만지는 모습이 보여 꽤 채워졌을거라 생각했었다.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모험가가 그라하 티아를 쳐다보았다.


"비었네?"

"생각보다 가져갈 걸 챙기기가 어려워서."

"발데시온 위원회를 도우러 간댔지? 그렇게 고민한 일인가? 두고 가도 나중에 챙길 수도 있잖아."

"그야, 타타루가 관리를 해주겠지만... 가능한 가져가고 싶어서. 분류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아무래도 서적과 도구들까지 포함이면 고민이 되네."


서적은 나중에 타타루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두고가는게 좋지 않을까 말했지만, 무게가 있어 부탁하기 미안한 것과 동시에 챙겨가고 싶다는 의견이 돌아왔다. 자신이 도와줄까 말을 꺼내도 거절할 뿐이었다.


"무슨 책인데 그래?"

"아니, 잠깐...!"


모험가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을 하나 손에 들었다. 가장 짐가방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이게 가장 고민이 되는 책일 것 같았다. 책을 펼치자 안에는 누군가가 직접 쓴 것 같은 글씨들이 보였다. 활자로 찍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직접 쓴 수기 책인 모양이었다. 내용을 대충 훑어보려고 할 때 그라하 티아의 손이 책을 잡았다.


"되돌려줄래?"


모험가는 힘을 주어 책을 빼앗아 가는 그라하 티아의 손을 막지 않고 얌전히 책을 돌려주었다. 가져가겠다는 걸 막을 이유도 없었고, 이정도면 이 책이 무엇인지 알기엔 충분했다. 책을 가져가고 책상위에 올려놓은 그라하 티아가 이를 앙다문 이유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일기일 거라곤 생각 못했어."


책에 적혀져 있는 글씨는 그라하 티아의 글씨체였다. 그라하 티아의 글씨를 많이 본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사칭을 막기 위해 새벽은 서로의 글씨체를 어느정도 파악해두고 있었다. 모험가가 펼쳐본 책은 시중에서 파는 책이 아니라 수기였다. 그라하 티아가 모험을 하며 바라본 것들을 적어놓은 책이었다.


"야슈톨라가 기록을 한다고 들어서. 나도,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두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하나 둘 적다보니까 늘어나서. 그냥 두고 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챙기자니까 부피가 커서 다른 물건들을 챙길 자리가 없다보니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지."

"이정도로 많이 쓴 건 확실히 아까울만 한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인가 생각해보면 나중에 타타루에게 보내달라고 해도 되는거 아냐? 내용을 멋대로 읽진 않을테고, 혹시 걱정되면 묶어놓은 채 보관했다가 그대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니까. 기록으로 남겨두면 그때 어떤 생각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그대로 남겨둘 수 있으니까 좋아. 딱히 역사서를 쓰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이런 수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몸소 겪어 알고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모험가가 멋쩍어하며 책 표지를 손끝으로 툭툭 치자, 그라하 티아는 웃으면서 빈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떠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이곳이 더 이상 새벽의 돌의 집은 아니게 되지만, 타타루가 계속 관리를 할 장소였기에 모든 물건을 챙겨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그라하 티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라하 티아는 모든 물건을 다 챙기고 떠나고 싶어했다.


돌의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타타루를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은 자신이 모두 챙기고자 했다. 약간의 강박에 가까운 그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진 그라하 티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마음이 타협을 하지 못하고 끝나지 못할 고민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발데시온 분관은 확실히 보관할 곳이 많아보였지."

"이런저런 의뢰가 들어오기도 하고, 의뢰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들을 모아두기도 하니까 보관할 곳은 많은 편이지."

"그래도 그라하는 방에다가 책을 쌓아둘 것 같지만. 심려의 방처럼."

"그건, 그 책들을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어...서..."


점점 그라하 티아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말이 멈췄다.


"역시 책은 두고갈까."

"그게 좋을 것 같아. 다시 꽂아두는거 도와줄까?"

"응, 부탁할게."


모험가는 자연스럽게 그라하 티아의 수기가 담긴 책들을 들고는 책장의 빈 곳에 꽂아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라하 티아는 심호흡을 하듯 깊은 숨을 내쉬고는 다시 챙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욕심을 버리자 그제야 무엇을 챙겨야하고 무엇을 두고 가야할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적은 기록들을 남들에게 보이면 안된다고 수정공일 때는 생각했다.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곳에 사는 자들과는 연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영웅에 관한 이야기, 세계에 관한 이야기. 이 모든건 자신이 짊어지고 갈 일이었지, 어디에 밝혀질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정공으로 있으면서 얻은 모든 정보와 자료와 기록들은 심려의 방에 쌓아놓았다. 그곳은 자신 밖에 들어가지 않는 장소였으니, 무언가를 보관하기에는 딱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크리스탈 타워 역시 사라질테니 이곳 사람들이 영영 자신의 기록을 볼 일은 없는 것이었다.


크리스타리움에는 그렇게 수정공이 직접 적은 기록들이 몇개 남아있지 않았다. 보고를 위한 서류에 있는 싸인과 박물진열관을 위해 적어놓은 약간의 기록들이 전부였다. 크리스타리움의 사람들은 수정공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밝히지 않아 한다는 것을 그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려고 하지 않았고,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수정공인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보낸 시간이 100년쯤 되는 탓일까. 아직도 그라하 티아는 자신이 남긴 기록은 누군가가 보아선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보안을 위해서라며 새벽에 남긴 몇가지 메모들도 결국엔 불태웠던 것이 떠올랐다. 자신의 강박의 원인이 어디인지 깨닫게 된 그라하는 심호흡을 하며 그 생각과 마주하기로 했다.


이제는 괜찮다고. 남겨도 되고, 누군가가 보아도 괜찮다고. 아니 오히려 자신의 수기는 영웅에 관한 내용이었기에, 오히려 누군가가 보면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미래에 영웅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가슴에 품었던 이들처럼. 아픈 상처가 많이 남은 이 아이테리스에서도 희망을 가슴에 품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아이테리스의 여러 일들을 도우러 가는 거긴 하지만."


쿠루루의 말에 따르면 발데시온 분관으로 온 의뢰가 꽤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특히 이번 종말로 인해 문제와 사건이 생겨 도움을 요청하는 의뢰가 잔뜩 들어왔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꽤 바쁠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이 가장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인가."

"그라하에게 별명 하나 붙여줄까? 일 중독자 라고. 아니면 멋지게 워커홀릭?"


책을 다 정리한 모험가가 웃으면서 그라하 티아에게 다가오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놀렸다. 100년을 수정공으로 일하고, 원초세계로 돌아와선 곧바로 새벽에 들어와 종말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더니 이젠 발데시온 위원회 재건을 위해 일을 하겠다고 한다. 쉴 시간이 대체 어디에 있는거냐며 잔소리를 하는 모험가는 모처럼 꼬투리 잡을 주제를 찾아서 신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먹을 것을 챙겨온 타타루가 즐거운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걸 듣고는 잠시 발을 멈췄다. 들어가도 될까 망설이는 동안 인기척을 느낀 모험가가 타타루를 불렀다. 타타루가 든 쟁반을 모험가가 받아들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도중이셨나용?"


신나서 타타루에게 말을 꺼내려는 모험가와 그걸 막으려는 그라하 티아의 목소리가 잠시 돌의 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곧 이 소리를 들은 다른 새벽들이 이 방에 몰려올 것이었다.


그런 흔하디 흔한 영웅과 동료들의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