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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길이 끝났다고 마지막은 찾아오지 않는다


  • 파이널 판타지 14 칠흑의 반역자 메인 네타가 있습니다.
  • 빛의 전사의 호칭은 '모험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의 전사의 묘사를 하고 있진 않지만, 제 캐릭터를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여성 모험가, 주 직업은 음유시인이라는 설정이라 생각하며 읽는 게 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 여러모로 게임 내 설정과 맞지 않는 부분, 날조 된 부분이 있습니다.
  • 대죄식자 IF 이야기라 불쾌하실 수 있습니다.


(2021. 11. 21 포스타입에 업로드 했던 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지혜 그리고 마음이 모여 굴그 화산에 그 탈로스는 세워졌다. 하늘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하얀 죄식자들은 요정왕인 페오와 일메그의 요정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탈로스는 완성이 되었지만, 안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저 정도의 크기를 이렇게 단시간에 만들어냈다. 안정적일 수 없었다. 죄식자들이 탈로스를 공격하기 전에, 그래서 탈로스가 무너지기 전에 어서 올라가야 했다. 바우스리가 있을 굴그화산 위로.


탈로스와 하늘에 떠 있는 굴그 화산을 올려다보는 모험가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 상태는 담담하지 못했다. 시야는 하얗게 바래버린지 오래였고, 쿨럭쿨럭 남들 몰래 하는 잔기침에는 빛이 흘러나와 그걸 몰래 처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파삭파삭 금이 가는 소리와 온몸을 덮치는 고통은 영혼이 깨지는 중이란 것도 경험으로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모험가는 담담한 표정으로 굴그 화산을 올려다보았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무엇보다 새벽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고 해도.


빛을 받은 것들은 죄식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대죄식자의 빛을 받아들인 자신은 당연히 대죄식자가 되겠지. 아마 다른 것들보다도 더 터무니없는 것이 될 테다. 모험가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죄식자가 된 이후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노르브란트의 사람들이 걱정됐다. 한편으로는 위리앙제가 준비한다는 해결 방법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분명 어떻게 해줄지 모른다는 그런 근거 없는 믿음.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불안한 저 탈로스와 비슷하다 생각하며 모험가는 웃었다.


"여유 있나 보네?"


누군가가 모험가 근처로 다가오며 부르듯 말을 걸었다. 탈로스와 굴그 화산을 올려다보던 모험가가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야는 하얗게 바래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익숙한 실루엣과 색깔에 말을 걸어온 사람이 알리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유는 없지만, 이게 마지막일 거란 생각을 하다 보니까."

"그러네. 바우스리를 이기면 이제 모든 곳에 어둠이 돌아오게 될 거야. 빛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언젠간 없어지겠지……."


그렇게 말하는 알리제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마 여행길 여관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죄식자가 될지도 모른단 불안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절망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적어도 모든 어둠이 돌아오면 그 사람들의 삶은 지금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질지도 모른다. 모든 어둠이 돌아온다면. 모험가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뻐끔대다 곧 굳게 닫았다.


"준비는, 다 된 거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괜찮으니까 부르려고 온 거 아냐. 가자. 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그래. 그러면 어서 가야지."


발걸음을 내딛자 다시 파삭, 파스스 소리가 들렸다. 귀를 통해 들리는 것도 아니고, 직접 머릿속에 울리는 느낌도 아닌 신기한 감각. 그러면서 욱신 내딛는 발과 움직이는 몸에 통증이 찾아왔다. 참았다. 아직 아니었다. 아직 아파도 될 때가, 힘들어해도 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마지막이 아니니까. 자신의 마지막은 저 굴그 화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니까. 이를 악물며 모험가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옆도 뒤도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다른 생각으로 채우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마지막이 존재할 앞만을 바라보았다.


모험가가 나타나자 모여있던 새벽은 모두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평소와 같았지만, 모험가는 오늘따라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저들에게 보답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있어서일까. 탈로스를 올려다볼 때만 해도 담담했던 마음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새벽이 하는 말도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자 어느새 탈로스를 타고 굴그화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수많은 죄식자들이 새벽과 모험가의 앞을 막았다. 막으려는 바우스리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그 소리들이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귀가 소리를 차단한 듯 조용한 세계 속에서 모험가는 싸우고 있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도,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신을 공격해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공격을 피하고, 화살을 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전투에 아무 문제는 없었다. 그는 모험가였고, 수많은 전장을 다닌 영웅이었다. 몸에 밴 전투 스킬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건블레이드를 든 채 앞서나가는 산크레드의 등이 보였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그의 모습이 매정하게 느껴졌다. 잠시만 멈춰줬으면. 그런 생각이 머리 한켠을 채우다가 쏘아낸 화살에 담겨 죄식자에게 박히고 사라졌다. 그런 무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는 건 모험가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감정을 털어냈다.


모험가는 자신과 탈로스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노력과 지혜와 마음이 모여져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이유였다. 모험가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위를 걷다, 새벽의 혈맹의 지혜를 빌려, 에오르제아의 마음을 받아 모험가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 안에 만들어져 불안하다는 것 또한 비슷했다. 모험가는 자신이 영웅의 그릇이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준비를 할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다른 사람의 노력을 짊어지고 이루어 냈더니 어느새 영웅이라 불리고 있었다.


모두 다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으나, 동시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너무나도 연약한 것이 되어 있었다. 휘둘리고 흔들려서 언제 영웅에서 무너질 지 모를 모험가와 죄식자의 공격에 언제 자기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지 모를 거대 탈로스.


"이런, 위험해!"

"모험가!"


탈로스의 끝에 다다랐다. 바우스리가 굴그 화산에 만든 새하얀 정원이 눈에 들어왔을 때 큰 소리를 내며 바닥이 쩌적 갈라졌다. 금이 간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황급히 모험가를 부르는 새벽의 목소리가 귀를 찌른 것도 순식간이었다. 무너지는 바닥에 반사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간 것은 모험가이고, 안전을 위해 린을 데리고 뒤로 피한 것은 새벽이었다.


산크레드와 야슈톨라의 시선이 모험가와 마주쳤다. 그들은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탈로스는 무너지고 있었다.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이 터무니 없이 높은 허공에서 바닥으로 추락할 미래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그 미래에서 모두가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페오가 도와주긴 하겠지만, 마냥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요정들은 하늘에 있는 죄식자들을 상대하는데 힘을 쓰고 있었다. 보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다시 거대 탈로스를 만들려고 했을 때 바우스리의 방해가 더 거세진다면 이렇게 빨리 다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어차피 대죄식자를 쓰러트리는 건 모험가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모험가만 넘어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판단하에 새벽은 물러났다. 야슈톨라도 이번의 빛까지 모험가가 견뎌낼 수 있을 거란 판단을 했다. 그 후 위리앙제의 대책을 해도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고.


탈로스가 무너지고 있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니 정말 빠른 속도로 전체에 금이 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이 무사히 땅에 도착했을까. 그런 걱정과 함께 어째서인지 모험가는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렇게 많은 사람의 힘을 모아 만들었지만, 덧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흙과 돌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덮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웃음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도움을 받고, 마음을 받고, 희망을 짊어졌다고 해도 결국은 갑작스레 만들어진 물건이다. 분에 겨운 일을 하면서 망가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이런 마지막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가. 바라서 이 자리에 온 게 아닌 것처럼, 마지막도 바라는 대로 찾아와주지 않을 거라고.


미친 사람처럼 웃는 모습에 바우스리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잠시 죄식자들이 움직임을 멈춰 그 모습을 지켜보듯 가만히 있었다. 곧 이때다 싶어 달려든 죄식자를 향해 모험가는 몸을 돌려 활을 겨누었다. 하나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죄식자를 바라보는 두 눈은 깊고 차가웠다. 단순히 적을 보는 것만이 아닌 다른 감정이 섞여 가라앉은 모습이 눈을 통해 보이는 듯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본인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모험가는 바우스리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부상을 입고, 고통이 온몸을 덮쳐와도 마치 남이 당하는 일인 듯 발걸음엔 주저함이 없었다. 허공에 괴물이라는 바우스리의 떨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죽갑옷이 해진 상태로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모험가의 앞에 바우스리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 표정은 분노에 찬 것 같기도 하고, 터무니 없는 무언가를 보며 약간 겁을 먹은 것 같이도 보였다.


"결국 여기까지 왔는가 반역자놈."

"낙원 참 예쁘게 만들어놨네~? 환영 고마워."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바우스리는 찌푸린 얼굴을 더욱 구기며 모험가를 노려보았다. 이곳에까지 발을 디딘 것도 모자라 훌륭한 자신을 하찮게 보는 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저것만, 저 자만 없었더라도 자신의 낙원은 견고하게 완성되었을 텐데. 자신의 훌륭함을 모두가 칭송하고 따랐을 텐데.


"모든 것이 네놈들 탓이다...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나를 방해하기만 하고! 그것도 여기서 끝이다, 반역자놈!"


바우스리가 쩌렁쩌렁 내는 큰 소리가 귀를 찌르듯 들려왔다. 모험가는 활을 세게 잡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탈로스는 무너져내렸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피할 수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걸 직시하고 자신의 손으로 마지막을 쥐어야 했다. 바라지 않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잔챙이 죄식자들을 부리며 바우스리가 공격해왔지만, 이미 수많은 죄식자를 쓰러트리고 이곳에 온 모험가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전투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모험가와는 경험의 차이가 달랐다. 바우스리의 공격은 대부분 파악되어 모험가는 좋지 않은 몸상태여도 가볍게 피했고, 바우스리는 반대로 모험가의 공격을 알아채지 못하고 피해를 입었다. 그 상황의 반복이었다. 


"어째서, 어째서냐! 내가 옳을 터인데, 내가! 내가 맞을 텐데! 왜 저항을 하는 것이냐. 왜! 왜!"


버티다 못한 바우스리가 소리를 치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힘을 담았기 때문인지 주먹 한 번 내려칠 때마다 충격이 모험가를 치고 지나갔다. 바우스리의 낙원 전체에 소리가 울려퍼지고 바닥이 흔들렸다. 한 두번은 버틸 수 있었지만, 횟수가 넘어가자 모험가의 머리마저 울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하얗게 변해 잘 보이지 않는 시야에 바닥이 흔들려 잘 보이지 않고 머리까지 울리니 감각이 점차 이상해졌다.


곧 모험가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차 싶어 서둘러 고개를 들어 바우스리가 있을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울린 탓인지 바우스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게 무언가가 보인다 싶었을 때 금색 빛만 보이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인 건 변해버린 바우스리의 모습이었다. 긴 금색의 머리카락에, 어느새 크고 길어진 금빛의 쇠 느낌으로 된 날개. 날씬해진 몸에 동글동글했던 외형이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변해있었다.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외형이었지만, 이곳엔 모험가와 바우스리만 있었던데다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우스리였다.


"바우,스리?"

"후, 후후……. 하하하하."


얻어맞다가 미쳐버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바우스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창같은 것을 모험가에게 겨누었다.


"이제 그 이름을 쓰지 말아라. 이 몸은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아... 그래. 이 수난, 이 모욕! 이 모든 것은 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시련이었나니!"


본인을 신이라 자칭하지만, 바우스리는 신에게 홀린 신도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모험가는 그 말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신' 그래.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렇다면 난 이 싸움을 받아들이겠다! 전능자 이노센스로서!"

"하하하하하! 좋아! 그거 좋네!"


무엇이 웃긴지 모험가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바우스리 아니 이제 전능자 이노센스가 되어버린 그의 낙원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웃음소리는 이제 막 신이 된 그마저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런 웃음소리를 바로 아까도 들은 적이 있었다. 탈로스가 무너져내린 순간 모험가는 비슷하게 웃었지만, 지금은 좀 더 느낌이 달랐다. 밝지만 어딘가 기괴한 느낌이 드는 웃음소리.


마치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내는 웃음소리 마냥 기괴함이 가득했다.


"좋아. 좋아! 마지막이 신 사냥 이라니 야만신 퇴치로 영웅이 된 자의 말로로는 너무나도 완벽한 마무리잖아?! 충분해, 최고야! 그래, 하이델린도 나를 마냥 버리지는 않는구나!"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차갑고 딱딱하던 아까와는 마치 다른 사람인 마냥 생기가 돌았다. 바우스리가 이노센스로 변한 것처럼, 신 그 한마디를 들은 것으로 모험가는 변했다.


"이노센스라고 했던가? 넌 모르겠지만, 원래 내 특기가 신 사냥이거든! 신을 잡는 게 일인 사람 앞에서 신을 자칭하다니 엄청난 배짱이네! 어디 신 사냥을 시작해볼까?!"

"이 무례한 것! 공포에 머리가 미쳐버렸나!"

"그래, 먼 옛날부터 신과 싸우면서 미쳐버린 거지!"


처음은 이프리트였던가. 처음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신을 잡아 영웅이 되고, 신을 잡아 마지막을 맞이하는 그 완벽한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험가는 가슴이 뛰었다.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고도 스스로 생각했다. 자기 목숨의 끝이 오는 건데 이렇게 가슴이 뛰고 설레다니 빛을 너무 많이 받아버린 탓에 머리도 미쳐 괴물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건 그거대로 좋을 것 같았기에.


의욕이 생긴 탓인지 모험가의 공격은 처음보다 매서워졌고, 전능자 이노센스 또한 변해서 힘이 각성한 덕인지 만만치 않은 싸움을 했다.  낙원에서의 싸움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모험가의 숨길 한번엔 빛이 섞여 나와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험가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없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새벽이 봤다면 놀랄정도의 표정 변화였다.


어떤 순간에도 힘차게 활시위를 당기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건지 활시위가 떨리기 시작했다. 백발백중에 가깝던 활도 점차 명중률이 낮아져 이노센스를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다른 곳을 향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런 모험가의 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이노센스였다.


거친 숨소리가 장소에 들리고 있었다. 거친 전투에 모험가도 이노센스도 숨을 몰아쉬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럴 리는 없어, 이럴 리는 없다고. 전능한 내가……."


무언가를 잡으려고 한 건지 손을 뻗던 이노센스가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게 그의 최후였다. 거짓된 반성도 없이, 후회도 없이 그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다 져버린 목숨.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떠날 것 괜한 후회를 안게 하는 것 보다는 잘 못 된 것이더라도 자신이 옳았다는 생각 속에 잠들 수 있다면 편하고 좋은 거겠지. 모험가는 숨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모험가가 고개를 숙인 사이 이노센스의 몸은 천천히 풍화되 듯 하얗게 변해가더니 이내 새하얀 빛이 되어 공중에 떠 있었다. 다른 대죄식자나 티타니아때와 똑같았다. 이게 마지막 남은 대죄식자의 빛이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모습에 모험가는 주먹을 쥐고 침을 삼켰다.


"잘 가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작게 흘렸다. 떠나버린 이노센스에게 하는 말일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 어쩌면 영웅을 잃게 되는 원초세계나 다시 어둠을 빼앗길 1세계에 하는 말 일지도 몰랐다. 모험가는 한걸음 앞으로 걸어가고 빛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두 눈을 세게 감았다. 더 이상 자신의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탈로스가 무너져내리는 걸 보고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걸 타고 올라가던 새벽도 아니고, 같이 탈로스를 만들었던 노르브란트의 주민들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 수정으로 된 팔이 눈에 띄는 그 사람이 가장 먼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모험가는 새벽과 함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곧 새벽만 돌아온 모습을 보고 이내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정공은 곧바로 페오를 불렀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위로 자신들을 데려다 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꺼냈다. 그의 오랜 친구인 페오는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아마로들이 내려와 새벽과 수정공을 등에 태웠고, 다른 요정들이 굴그화산을 향하는 그들을 호위하며 날아갔다. 처음에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방해하는 죄식자들을 상대하느라 거의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곧 어찌할지 모르고 우왕좌왕 하는 죄식자의 모습이 보였다. 모험가가 바우스리를 쓰러트린 것이라고 기뻐하듯 말하는 린과 알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뛰었다. 이겼다는 소식은 기쁜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꼭대기까지 날아가기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바우스리의 지휘가 없는 죄식자들을 무시하고 날아가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기를. 버텨주기를. 이토록 간절히 바랐던 적이 수정공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정상에서 수정공은 힘풀린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바닥에 주저앉지 않도록.


"아무도 없는……."


알피노가 말을 하며 걸어갔다. 중앙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는 발을 멈춰섰다. 그런 알피노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며 알리제가 빠른 걸음으로 근처로 다가가더니 곧 말을 잃었다. 하나 둘 새벽이 알피노가 서있는 곳으로 모였다. 그곳으로 다가가지 않은 건 버티는게 고작인 수정공 혼자 뿐이었다.


바닥에 바른 듯 널려있는 건 새하얀 무언가였다. 색이 붉었다면 참상의 흔적으로 보일 양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볼 기회가 많았을 알리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았다. 정확히는 누구를 찾고 있었다.


위리앙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탈로스가 무너져 일단 한번 땅으로 내려왔을 때 그 역시 불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모험가는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고 버텨온 사람이었다. 그 잠시 역시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믿음이 해선 안되는 믿음이란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굳게 믿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이 너무 늦었다. 자신은 언제나 늦었었다.


산크레드를 따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린은 주위의 분위기를 보고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빛의 이유를, 굴그화산에 올라왔는데도 보이지 않는 바우스리와 모험가의 모습을.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생각했다. 아마로를 타고 날아올 때 우왕좌왕하는 죄식자의 모습으로 분명 바우스리를 쓰러트린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어째서 콜루시아의 하늘엔 어둠이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모험가씨는 어디에 계신걸까요?"


린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들 스스로 가슴에 품고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면서도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다들 어느정도 생각하는 바는 있을 것 같지만, 제일 먼저 물어봐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네요."


야슈톨라는 뒤를 돌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명은 얼굴을 감싼 위리앙제. 한명은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수정공이었다.


"그 모습, 마냥 관계가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거 같은데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찾는 것도 중요하니까 나는 좀 더 찾아보고 올게."

"저도 산크레드와 함께 찾아볼게요."

"그러면 난 저쪽을 가볼테니 린은 반대를 부탁해도 될까?"

"네!"


린은 흘깃 위리앙제와 수정공을 바라보고는 산크레드가 부탁한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산크레드처럼 모험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게 제일 중요했다. 모험가가 무사히 있다는 것을 봐야지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생길 것 같았다. 린의 뒷모습을 바라본 산크레드는 작게 한숨을 쉬고 자신이 찾기로 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아마 이곳을 아무리 찾아도 모험가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품에 안고 일단은 몸을 움직였다.


남은 건 알피노와 알리제, 야슈톨라와 위리앙제 그리고 수정공이었다. 너는 찾으러 가지 않느냐는 알피노의 말에 알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터무니 없는걸로 모험가를 위험에 빠트린거라면, 용서하지 않겠어."


알리제의 말을 듣고 수정공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후드에 손을 대어 천천히 손을 뒤로 옮겼다. 후드가 벗겨지자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머리카락의 끝부분은 하얗게 세어 있었는데, 약간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동그랗게 새빨간 눈은 약간의 망설임이 있는 채로 이 장소에 남아있는 새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오롯이 지고 가야 할 책임이었다.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이상 더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그를 찾는 것이 우선이긴 하니, 길게 이야기 하진 않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가 이곳에 없다는 걸 확인 한 후 크리스타리움에 돌아간 다음에 하도록하지."

"할 이야기가 있단 소리네."

"……그래. 내가, 당신들과 그를 기만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정공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말할 순 없었기에, 모험가와 관련된 이야기만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오게 되었으며 무슨 목적으로 모험가를 불러 빛을 받아들이게 했는지. 그리고 그 마지막은 어떻게 끝내려고 했는지까지 말을 하는 도중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달려온 알리제가 어느새 수정공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말리려는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모험가를 살리자고 모험가를 위험에 빠트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할 말은 없었다. 모든 게 사실이었다. 이를 악물고 수정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날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알리제는 확 멱살을 놓고는 수정공을 지나쳐갔다.


"나도 모험가를 찾으러 가겠어. 아직, 아직 괜찮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을지도 모르니까."


알리제는 그 말만 하고는 곧바로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알피노도 서둘러 알리제의 뒤를 따랐다. 책임은 그를 찾고 나서 다시 묻겠다는 말을 흘리듯 남기고 떠났다.


"당신이 갖고 있다는 대책도 그였겠군요. 안 그런가요, 위리앙제?"

"그렇,습니다."

"그래요. 당신이 말을 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이상적인 계획이었을 수도 있겠죠. 나도 그 사람을 찾으러 가겠어요. 모두 이곳으로 돌아올테니 두 사람은 여기서 돌아온 사람들이 엇갈리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렇게 하지."


야슈톨라도 떠나고 두 명만 남은 자리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건 모험가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바우스리를 쓰러트리고 빛을 받아들인 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디로 향했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눈을 찌르듯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수정공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도 빛이 들어와 어둡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고, 어디가 잘 못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내려 쏟아지는 빛이 어지러울 정도로 눈이 부셨고,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장소에 흩뿌려진 흰 빛이 너무 처참하게 보였다. 홀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악물고 홀장을 쥔 모습은 이 곳에 처음 올라왔을 때 곧장 쓰러질 듯 아슬아슬했던 때와 달랐다. 그 분노는 확연하게 수정공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기다리지. 다들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올 때까지."

"……예."





눈 앞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게 버텨보려고 했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딱딱한 바닥에 대처도 못한 채 쓰러진 거니 온몸이 아픈 게 정상일텐데 그런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숨 쉬기 힘들었고, 온몸이 아팠지만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진 않았다. 이상한 느낌의 고통에 시달리던 모험가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쿨럭, 켁. 큭, 우엑."


처음은 기침으로 시작했지만, 숨을 들이 마시면서 무언가가 목에 걸린 이물감이 들었다. 그 이물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헛구역질이 나오자 입을 막은 손 사이로 흰 빛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번 나오기 시작한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따라서 빛도 멈추지 않았다. 통증에 몸을 비틀자 뿌려진 빛들이 옷에 쓸려 바닥에 칠해지듯 밀어졌다. 모험가의 입주변도 손도 어느새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거친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딱, 딱. 차가운 바닥에 울리는 발소리가 모험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모험가를 바라보며, 걸어온 누군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모험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고 억지로 얼굴을 들어올려 자신과 눈높이를 맞췄다.


"꽤 볼만한 꼴을 하고 있군. 응? 영웅님?"


아씨엔 에메트셀크. 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싫은 표정을 짓는 일도 싫은 말을 꺼내는 일도 할 수 없었다. 모험가는 이미 숨을 쉬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무언가를 할 힘이 더 이상은 없었다.


"그래, 고작 이 정도인거지. 겨우 이 정도의 빛에 이따위 모습이 되는 게 너희들의 최선인거지."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에 실망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말투로 에메트셀크는 떠들고는 모험가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을 흘깃 내려다보던 에메트셀크는 손바닥을 어깨 위로 올리며 한심하다는 행동을 취했다.


"이젠 듣지도 못하고, 행동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군. 괴물로 변해버리는 것도 시간 문제겠어."


모험가를 등지고 몇걸음 걸어가던 에메트셀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섰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멈춰서 서있더니 몸을 살짝만 돌려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들릴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이게 들린다고 한다면 내가 자비를 베풀어주지. 만약 어설프게 이성이 남아 괴로울 때엔. ……템페스트로 와라. 거기서 너의 마지막을 비웃어주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금빛으로 빛나는 낙원에 서 있던 존재는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흐르는 빛은 멈추지 않았다. 입에서 흘러나오던 빛은 어느새 눈물처럼 눈에서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모험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 상태가 되어서도 머릿속을 채우는 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대죄식자가 되고 어쩌면 대적하게 될지도 모를 새벽의 혈맹이나, 모처럼 어둠을 찾아서 기뻐했는데 다시 빛이 되돌아와서 실망할 노르브란트의 사람들. 어떻게 된건진 모르겠지만, 영웅인 자신을 믿고서 불러준 수정공까지. 머릿 속에 스쳐지나가는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기침이 잦아들 때 쯤 에메트셀크가 말을 하고 떠나갔기에, 그의 말을 듣지 못한건 아니었다. 그러나 템페스트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할 곳에 숨어 있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도 아니었다. 새벽은 이곳을 다시 올라올터였다. 올라오자 마자 대죄식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몸에 힘을 줘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죄식자가 된다고 해도 이곳은 아니었다. 좀 더 다른 장소를 향해야했다. 다리가 더이상 자신의 다리같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에 매달려있고 그걸 다리처럼 쓰는 감각이 들었다. 이걸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동을 할 때까지 이건 다리로 사용해야 했기에 떼어낼 수 없었다.


무엇이 이성적인 생각이고 무엇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감각을 기준으로 하는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모험가였던 그것은 처음 생각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리고 땅의 끝에 다다랐을 때 잠깐 멈춰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야는 빛으로 가득차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녕.

내가 좀 더 영웅다웠으면.

내가 좀 더 강했으면. 진짜 영웅이었으면.

이런 결말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모험가의 생각은 말로 나오지 못한 채, 땅의 끝에서 몸을 내던진 대죄식자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빗나가길 바란 예상이 적중했다. 돌아온 사람들 중 모험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둘 위리앙제와 수정공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두운 표정만으로 전부 알 수 있었다.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 제일 처음 입 밖으로 꺼내 상황을 확인 시킨 것은 알피노였다. 그가 찾지 못했다고 말을 하자 야슈톨라, 린 순으로 입을 열었다.

 

알리제는 분노에 찬 얼굴로 다른 새벽을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나 갈 것 같이 매서운 눈빛이었지만, 스스로 겨우겨우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험가를 찾으며 알피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온 모양인지 다시 멱살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정공은 오히려 그런 상황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아까처럼 멱살이라도 다시 잡으면 그나마 자신의 마음도 괜찮아졌을지 모른다. 그런 바라선 안될 것을 잠시 바라고는 숨을 골랐다.

 

“페오를 다시 부르지. 일단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가서 자세히 말하겠네.”

“그래. 납득이 갈 만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네.”


후드를 벗어 얼굴이 드러난 수정공의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끓어오르는 속은 자기 자신 밖에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밝혀야하는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페오를 부르자 곧바로 자신의 어린나무를 찾았다. 숨을 삼킨 후 수정공은 이곳에는 없으니 일단 밑으로 내려가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전했다.


"알았어. 밑으로 내려다 준 다음엔 아이들을 데리고 일메그로 돌아갈게. 어린나무는 나도 찾아봐야겠는 걸. 정말, 늘 다른 사람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는 둔한 사람이라니까."

"그래. 찾아준다면 정말로 감사하네."

"이만 가볼까요. 이곳에 있을 이유도 이젠 없으니까요."


알피노의 부탁과 함께 야슈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날아온 아마로들의 등에 한명씩 올라탔다. 하늘엔 어느새 죄식자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요정들의 공격에 쓰러졌거나, 명령을 내리던 바우스리가 사라졌으니 어딘가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빛 사이로 아마로를 타고 모두 땅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가와 어떻게 된 상황인건지 물어봤지만, 그것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모험가를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 그 모습을 보게 된다면 꼭 크리스타리움으로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말만 남길 수 있었다. 그 말에 그곳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대략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탈로스가 무너진 사이 무슨 일이 생겼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콜루시아 섬에 있던 사람들과 탈로스를 만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끝없는 빛이 돌아온 하늘 아래 원래 지내던 마을로,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마로를 타고 레이크랜드로 돌아온 수정공과 새벽은 빛이 돌아온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정공!"

"라이나. 별 일은 없었나?"


후드를 벗은 수정공의 모습을 보고 라이나가 잠시 놀라는 듯 하더니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빛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놀라하는 주민들과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대부분 일상으로 복귀를 하였으나 혼란한 상황은 더 지속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알았다. 떠돌이 죄식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늘어날 수 있으니 경비에 신경을 쓰는 편이 좋겠어."

"알겠습니다."


크리스타리움식 경례를 하고 새벽과 수정공을 배웅하는 라이나는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한 사람 부족한 인원수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렇지만 전투는 언제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항상 죄식자와 마물들과의 전투에 가까이 있는 라이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돌아왔던 게 거짓말인 마냥 레이크랜드의 하늘엔 빛이 넘치고 있었다.


익숙한 성견의 방으로 돌아온 새벽과 수정공은 곧바로 이야기를 나눴다. 정확히는 수정공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위리앙제가 말한 이야기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이며, 그와는 협력관계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원래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어야 했는지까지. 그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말했다.


그들 밖에 없는 그 푸른 공간에 수정공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며 생긴 무거운 분위기는 끝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분노를 그대로 표정에 드러내는 사람, 차분해 보이지만 그 시선은 책임을 묻고 있는 사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사람과 두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보기 어려운 사람까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지금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째서 말을 하지 않았던거야. 왜."

"알리제."

"이게 최선이었다는 말은 하지마! 결국 최선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뭐야 이게. 대체 뭐야. 결국 남은 건 그 사람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 하나뿐이잖아."

"……내가 말할 건 아닐지 몰라도, 이건 모두에게 말을 했어야 했어. 두 사람이 이렇게 속이고 진행할 게 아니었다고."

"죄송합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일은 이미 일어나버린 상태니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마도 마지막 대죄식자의 빛을 받아들이고 사라졌을 우리 영웅님의 행방 같은 거 말이죠."

"굴그 화산에는 안계셨죠. 대체 어디로 가신걸까요."


각자 여러 생각을 해보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모험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고, 모험가로서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 외 세세한 정보가 없었다. 항상 무슨 돌의 집이나 새벽의 곁으로 돌아왔기에, 언제나 그랬기에 늘 그럴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이렇게 모험가가 스스로 새벽의 곁을 떠날 때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찾기 어려운 곳에 혼자 있으려고 떠난 거겠지. 빛을 받아들이고 생각보다 힘들어 했을지도 모를 일일세. 모험가는 힘든 일이 있으면 자주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들어가 시간을 쓰곤 했었으니까."

"그 녀석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나?"

"용머리 전진기지……, 그러니까 눈의 집과 이슈가르드에 막 들어갔을 때엔 자주 그랬었네."


그 언젠가 누명을 쓰고 도망쳤을 때의 이야기가 나왔다. 알피노 의외엔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알리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알피노에게 달려들 듯 다가가 주로 어떤 곳에 들어가서 있었는지, 어떤 장소를 편해했는지 등을 물었다. 당황하면서도 일단 답해주는 알피노였지만, 단서가 될만한 이야기는 마땅히 없었다.


"그럼 아므 아랭으로 가볼게. 그곳은 사람이 가지 않는 곳이 아직 많이 있으니까 어쩌면 아므 아랭으로 향했을지 몰라."

"나는 콜루시아로 돌아가겠네.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요정왕과는 친밀한 사이이시니 어쩌면 일메그로 향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제가……."

"그러면 저는 라케티카군요. 그곳도 울칭한 숲에 몸을 숨길 곳은 많으니 숨기엔 적격일 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레이크랜드를 좀 더 찾아보도록 할까. 린, 너는 어때?"

"네. 저도 좋아요. 모험가씨라면 분명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오고 싶으셨을 거예요."

"만약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곧바로 알려주겠네. 병사나 다른 지역에 갔던 상인이 정보를 가지고 올 수도 있으니 말이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 대한건 모험가를 찾고 난 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어!"


성견의 방에 쩌렁쩌렁 울리는 말을 남겨놓고 알리제는 뒤돌아 나갔다. 그 말을 부정하거나 말을 덧붙이는 사람 없이 하나 둘 성견의 방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져갔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가자 수정공은 뒤를 돌아 벽에 걸려있는 도구를 쳐다보았다. 그것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수정공에게 한 보고가 들어왔다. 레이크랜드 홀민스터 근처로 날아가는 새하얗고 커다란 무언가를 본 사람이 있다는 보고였다. 라이나와 병사들은 새 죄식자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며 걱정했고, 수정공은 그 보고를 듣자마자 스스로 확인해보겠다며 크리스타리움을 뒤로 하고 달려갔다. 다른 죄식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호위를 자처한 라이나마저 거부하고 그는 홀로 홀민스터를 향했다.


예전에도 한번 크리스타리움을 이렇게 달려나온 적이 있었다. 모험가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간 것이었다. 지금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모험가를 맞이하러 홀민스터로 달려가는 중이었으니. 그저 그때와 다른 것이 있으면 모험가 일지도 모를 무언가를 맞이하러 가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모험가일지, 아니면 그저 다른 죄식자일지. 그것도 아니면 가장 바라지 않은 모습을 한 어떤 것일지는 곧 있으면 알 수 있게 될터였다.


차오르는 숨에 수정공은 잠시 발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아마 더 안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한번 죄식자 무리가 습격했던 장소라 그런지 바람이 부는 소리만 가득하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전 습격 이후로 출입을 금지한 탓인지 어느새 황폐한 느낌이 드는 장소로 변해있었다. 주위를 한번 살펴본 수정공은 다시 더 안쪽으로 달려갔다.


안쪽, 더 안쪽으로. 발엔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고 뛴 탓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볼 지도 모른다는 걱정 탓인지 심장은 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린 끝에 수정공은 새하얀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아……."


짧은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봤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이 이렇게 말했다. '새하얗고 커다란 무언가'를 봤다고.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모험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미 알고서 달려왔음에도 눈 앞에 나타난 그것에 수정공은 홀장을 놓쳐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새하얀 날개를 단 그것은 사람 목소리와 홀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금간 도자기처럼 새하얀 몸 전체에 금이 간 모양으로 금색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엔 금색으로 빛나는 화려한 장식들이 덕지덕지 붙은 가시나무처럼 생긴 관이 씌여져 있었다. 목에 달려 있는건 얼핏 봐선 가죽으로 된 목장식 같아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손이었다. 깍지를 낀 손이 마치 목을 조르듯 목을 감싸고 있었다.


덩치는 홀민스터에서 만났던 대죄식자인 필리아만해 보였다. 그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새하얀 것들이 옷의 역할을 하는지 자세히 바라보니 그 안에 있는 몸은 웅크리고 있었다. 제대로 일어나면 필리아보다 더 클 것 같았다. 그것은 수정공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었다. 자기 가지고 있는 4개의 팔 중에 기이하게 긴 2개의 팔을 뻗기만 해도 잡힐 거리에 있는 먹이를 건들지도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 인가."


모습이 변했지만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피부에 금색으로 빛나는 금간 모양 등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을 법한 것들을 갖고 있어도 그 모습은 수정공이 알고있는 모험가와 흡사했다.


"정말, 정말로."


새벽에게 자신이 한 일을 고할 때에도 담담했던 수정공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 영웅 그대가 맞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고, 뺨을 적시는 눈물은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기다려온 것이 아니었는데. 한순간 엇나갔다고 이런 결말이 찾아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채 보내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고 서 있을 것 같던 수정공이 바닥에 무릎꿇고 앉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소리 없이 눈물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바람에 끝부분이 흰 붉은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수정공 앞에 있는 그것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경계를 하지도 않았다. 순한 동물이 앉아있는 것 마냥 위협적인 모습 없이 그저 그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빛이 흘러넘치는 하늘 덕분에 밝은 밤이 찾아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크리스타리움의 수장인 수정공을 기다리던 라이나와 병사들은 홀민스터로 향했다. 어쩌면 죄식자들로 인해 오지 못하게 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역시 병사 한명이라도 호위를 붙였여야 했다는 후회 속에 걷던 라이나의 앞에 수정공의 모습이 보였다.


초췌해보이는 수정공의 얼굴에 라이나는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잃고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손녀의 모습으로 달려갈 뻔 했다. 지금까지 오래 함께하면서 어딘가 달관한 모습과 피곤해 하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저렇게 초췌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수정공!"


다른 병사의 목소리에 라이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천천히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모습을 한 수정공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나. ……아, 그래. 걱정을 끼친 모양이군. 난 괜찮다."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부터 기력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자신을 마중나와 준 병사들을 수정공은 고개를 돌려 한번 훑어보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다들 수정공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밤. 수정공의 입을 통해 최후의 대죄식자가 홀민스터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동시에 홀민스터 출입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대죄식자는 눈 앞에 나타난 존재를 보았다. 그것은 눈에 익은 로브를 입고 있었고, 낯이 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개가 같이 있다는 점에 대죄식자는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저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고, 저 얼굴을 한 사람 또한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죄식자가 되어 머리가 돌아가지 않게 된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둔한 건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수정공의 로브를 입고 그라하 티아의 얼굴을 한 그가 눈 앞에 서 있었다. 그 사실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쓴 시간만큼, 깨닫고 난 이후에 온 충격은 훨씬 컸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 수정공으로 서있던 사람이 그였다는 걸 깨닫자 대죄식자는 놀라 그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예전만큼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상태가 좋을 때는 어느정도 머리가 돌아가곤 했다. 어설프게 이성이 남으면 찾아오라는 에메트셀크의 말이 저주가 된 것인지, 그저 예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죄식자는 템페스트로는 향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이상이 남아버린 대죄식자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오지 않을 곳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본능 또한 거스를 수 없었는지 마치 귀소본능처럼 크리스타리움의 근처로 날아갔다. 그렇게 자리 잡게 된 곳이 이 홀민스터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내려면 낼 순 있었겠지만, 말을 하고자 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수정공에게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전하고 싶었지만, 그를 부르기 위해 손을 뻗으면 그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대죄식자는 뭘 할 수가 없었다. 그 몸집은 너무나 거대해졌고, 그 힘 또한 자신의 강함에 따라 터무니 없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수정공이 자리를 떠났을 때야 대죄식자는 후회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슬펐다. 두 눈에는 하얀색 빛이 흘러나와 땅을 적셨다. 땅에 떨어지고 흙에 흡수되어 사라졌던 수정공의 눈물과는 달리, 대죄식자가 흘리는 하얀 빛은 그대로 땅을 빛으로 물들었다.


대죄식자는 슬픔이란 빛을 흘리며,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고 싶었던 말을 반복했다. 수정공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이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마저 모르게 되었어도 그 언젠가 말로 전할 수 있게 되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