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널 판타지 14 드림글 입니다.
- 캐릭터는 아이메리크, 주인공은 여성 아우라 렌 빛의 전사 입니다.
- 파판14 효월까지의 네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효월 엔딩 이후의 시점입니다.
- 이전 발렌티온 글인 '기회와 후회의 발렌티온 데이'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 드림이 불편하신 분은 이 창을 닫으시거나 뒤로 가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2023.02.13 포스타입에 업로드 했던 글)
당연하게 찾아온다 믿었던 내일이 영영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가득한 시간이 흘러가고, 그때의 공포가 남긴 상흔을 다 같이 이겨내는 시간이 찾아왔다. 종말이라 불린 그 공포를 이기고, 세상에 내일을 찾아온 영웅은 그런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나름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변변찮은 보상이 없더라도 짐을 옮겨주기도 하고, 사람을 찾아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구해주기도 했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였고, 내일이 찾아왔음을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다. 종말 이후의 세상은 온갖 곳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고 다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부탁이나 의뢰 아닌 의뢰를 해온 탓인지 모험가의 시간 감각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어제인지, 오늘이었는지. 의뢰 보고를 한 게 며칠 전이었던가. 늦지 않게 보고했으니 된 거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지내던 모험가가 알록달록한 장식품들을 보고 나서야 지금이 언제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오랜만에 방문한 그리다니아에는 붉은색 장식과 하트 모양을 한 장식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쩐지 낯익은 상황에 모험가는 미간을 짚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나가면, 마지 종말이 찾아오기 한참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발렌티온이구나."
종말을 막느라 전 세계 심지어 고대에까지 가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 탓에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일이 붉은 장식을 보고 있자니 떠올라서 미간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런 일은 없었어. 잊자. 잊어버리자. 상대방도 몰랐을 거야."
정말 모를까.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모험가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꾸욱 눌렀다. 그런 생각은 하는 게 아냐. 속으로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알고서 온 것은 아니지만, 온 김에 발렌티온 행사를 도와줄까 생각하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지금은 맡은 일도 없이 한가한 때였다. 타이밍이 잘 맞는다며 모험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미케토 야외 음악당을 향했다.
화려한 붉은 장식들이 가득한 음악당 무대 위엔 늘상 보는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불러보자 무대 위에 서 있던 아스트리드가 모험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획 돌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저렇게 급하게 부탁할 일이 생긴 건가. 모험가는 놀라 얼굴이 굳었다.
"마침 잘됐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 뭔데? 뭐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스트리드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있었고, 놀란 모험가 앞에 멈춰 선 아스트리드는 그걸 모험가에게 내밀었다. 하얀 종이. 아니, 편지 봉투였다.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모험가는 흰색 편지 봉투를 받아들었다. 편지 봉투에는 모험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같이 왔습니다."
"초코?"
"네. 문제가 있어서 포장이 좀 벗겨졌는데, 내용물은 안전해요. 포장에 그 편지가 같이 묶여있었으니까 이 초콜렛도 모험가님에게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고마워. 근데 이거 누구에게서 받은거 야?"
"그걸 모르겠어요. 쿠뿌가 받아왔는데 누가 준 건지도 알 수 없고, 이름은 모험가님의 이름만 적혀있어서 오실 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발렌티온 초코를 줄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알리제나 그라하가 선물을 보내준걸까. 그렇다면 편지 봉투에 뭔가가 적혀있을 가능성이 컸다. 모험가는 망설임없이 위화감이 느껴지는 하얀 편지 봉투를 뜯어 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라 생각되는 걸 꺼냈다. 그러나 편지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새하얀 종이, 백지였다.
"앗."
모험가가 반응하는 것보다 먼저 아스트리드가 반응했다. 모험가는 눈을 질끔 감았다. 편지 봉투를 보고 내내 느껴진 위화감의 정체가 눈 앞에 들이밀어지자 눈 앞이 어질어질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답장이 온 것 같네요. 다행이에요!"
"아니, 아닐지도 몰라. 상대방은 모를 수도 있,어."
그러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의 편지를 보낼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런 장난을 자신에게 칠만한 사람은 새벽의 혈맹 중엔 없었다. 그 외에도 없었다. 애초에 발렌티온 초코를 주고 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면 가능성은 자신이 백지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 그 사람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 사람이라면 정말로 문제였다.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하려고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고, 백지를 보낸 것인데 이렇게 답이 돌아왔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사실 아닌가.
"……확인하러 가봐야겠어."
"힘내세요!"
"아니, 아스트리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게는……. 아니다. 고마워, 아스트리드. 보관하고 있어줘서. 나중에 다시 올게."
몸을 돌려 음악당을 떠나는 모험가의 등을 보며 아스트리드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했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등을 돌려 인사를 받아주고 떠날 모험가였지만, 도저히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 속에는 설마란 단어만이 가득 차 떠나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빠르게 이슈가르드 에테라이트를 목표로 텔레포를 시전했다. 에테라이트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신전기사단 건물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보낸 게 맞다면, 그 사람은 지금 그 건물 안에 있을 것이 뻔했다. 매일 그렇듯이 건물 안 방에 들어가서 산처럼 쌓인 일과 데이트를 하고 있겠지. 일하고 아니 정확하게는 이슈가르드와 언약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우스갯소리가 아닐 사람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모험가가 신전기사단 건물 문을 코앞에 두고 우뚝 멈춰섰다.
"잠깐, 일하고 있을 거 아냐."
자신이 아무리 그 사람과 아는 사이이고, 이곳 이슈가르드의 영웅이어도 용무 없이 방문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볼일이 있어야만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즉 지금 달려가봤자 그 사람에게 직접 이거 당신이 보낸 것이 맞냐고 물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이런 사적인 일 때문에 신전기사단 건물 안에 눌러앉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엔 잊힌 기사 주점에 앉아 밤에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를 수 밖에는 없는걸까. 고민하면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모험가는 다시 에테라이트 광장 쪽으로 돌아갔다. 머리에 피가 쏠려 달려왔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곧바로 달려오지 않아도 될만한 일이었다.
이슈가르드에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또 잊힌 기사 주점에 눌러앉고 싶진 않았다. 고민하던 모험가는 시장 구경이나 하자며, 보석홀장 거리로 향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홍보하고 있는 브랜드상품도 팔고있으니, 언젠가 한번쯤은 확인하러 와야겠다고 생각은 하던 참이었다. 라고 어떻게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이동했다.
발걸음은 보석홀장 거리 입구에서 뜻밖의 사람을 마주해 멈추게 되었다. 상대방도 여기서 모험가를 볼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투아……. 아니, 포르탕 백작님."
포르탕 백작이 된 아르투아렐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옆에 함께 나온 것 같은 집사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굳이 호칭을 바꿀 필요는 없어. 귀공에게 그렇게 딱딱하게 굴 생각은 없으니까."
"아직, 입이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조만간 괜찮아질겁니다."
"귀공에게 그런 존대를 듣게 될 줄도 몰랐군."
"예전 일은 예전 일로 두시죠. 이제는 예의 차려야 할 사람에게 제대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귀공은 충분했는데 말이지, 에마넬랭이야 말로 배웠으면 좋겠군."
아르투아렐을 처음 본 순간부터 놀라서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던 모험가가 에마넬랭의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표정이 풀리더니 쓰게 웃었다. 미간은 찌푸리고 있었으나 확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입가는 모험가가 그를 그렇게 나쁘게 보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었고, 그건 아르투아렐에게 약간의 안심감을 주었다.
"사고는 치지 않은 것 같은 것 같군."
"적절했다고 해야 할 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고 해야할 지……. 가끔 정말 상상도 못할 판단을 하시네요. 포르탕 백작님."
"어디든 던져놓아야 그녀석도 무언가 의미있는 결과물을 가지고 오지 않겠나."
뭐라고 답은 하지 못했지만, 모험가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게 가르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름 에마넬랭에게 딱 맞는 교육법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서든 적응 잘 할 것 같은 그 성격을 살려서 아르투아렐도 고생하고 있구나.
"고생하시네요."
"귀공은 어떤 일로 이곳까지 찾아왔지?"
"딱히 큰일이 있는 건 아니고 물건을 좀 확인하려고 왔어요. 특정 브랜드를 한 번 보러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브랜드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 같이 동행하지 않겠나? 괜찮으면 용무가 끝난 후 저택에 들러 차도 같이 하지. 갈레말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군."
"좋아요. 보고로는 들을 수 없을 아주 생생한 에마넬랭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둘은 사이좋게 나란히 걸으며 보석홀장 거리로 걸어들어갔다. 사람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시장이다보니 어느정도 사람 눈이 있는 장소였다. 그 중엔 성도를 순찰 중인 기사도 있었고, 이슈가르드의 영웅과 젊은 포르탕 백작의 얼굴 정도야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순찰을 돌고 신전기사단 건물에 돌아온 기사는 순찰 보고와 교대를 마치고 쉬는 시간 짧은 잡담을 동료와 나누었다. 평소라면 별 문제 없을 잡담이었지만, 정말 운이 안 좋게 그 내용이 한 사람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아까 젊은 포르탕 백작하고 영웅님이 같이 보석 홀장 거리를 걷는 걸 봤다."
"오, 어떠냐 역시 그림이더냐?"
"그럼, 그림이지. 역시 그정도는 되어야지 영웅님의 곁도 걸어보는걸까. 나는 아직 말도 못 걸어봤는데."
"너도 창천거리 쪽 가지 그랬어. 저번에 영웅님 창천거리 사업 돕느라고 그쪽에서 사셨다더라. 그때 다들 말 엄청 걸었다는데."
"그때는 거기 계신지 몰랐지! 아, 그냥 곁에 있는 젊은 포르탕 백작은 못 본 척 하고 말이나 한번 걸어 볼 걸 진짜. 나도 영웅님의 축복 한 번 받아보고 싶다."
"영웅이 찾아왔었나?"
차분한 목소리에 기사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누가봐도 선명한 푸른빛 갑주는 이슈가르드에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아보는 모습이었지만, 신전기사라면 더더욱 못알아 볼 수 없었다. 귀족원 의장이자 신전기사단 총장을 겸임하고 있는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 아이메리크 드 보렐의 모습이 보였다.
표정에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심 그는 놀라고 있었다. 모험가가 이슈가르드에 찾아올 거란건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은 발렌티온 기간이었고, 모험가는 이런 이벤트를 무척 좋아해 매번 참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분명 그때의 답변으로 보낸 백지를 받고 금방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들 많군. 영웅이 찾아왔었나?"
"아, 그건 아닙니다. 보석 홀장 거리에서 영웅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잘 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들려오는 보석 홀장 거리란 단어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젊은 포르탕 백작이라면 아르투아렐 경이었다. 이슈가르드를 방문했을 때, 누명을 쓴 모험가는 포르탕 저택에 의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로인해 오르슈팡 뿐 아니라 아르투아렐과 에마넬랭까지 어느정도 친분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발렌티온이라는 이 시기에, 자신이 백지의 종이를 보낸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슈가르드를 찾아온 모험가가 아르투아렐을 만났다 하면. 혹시 그 백지가 자신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니었나.
"그런가. 고맙네."
혹시 찾아오면 보고해달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고 짧게 말을 끊었다. 기사들이 경례를 하는 것을 뒤로 하고 아이메리크는 발걸음을 옮겼다. 늘 곁에 있던 루키아가 얼마나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썼는지 새삼스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모험가는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집무실로 이동하면서 그렇게 굳게 생각했다. 만약 백지가 자신만 받은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모그리족을 통해 전해진 말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보낸 것이었다. 모험가가, 자신에게.
우선은 언제 찾아와도 괜찮도록 일을 빨리 끝내고, 기다리자. 모험가가 이슈가르드 내에 누구와 친분을 갖고 있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더라도 신경 쓸 필요없다고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는 결국엔 자신을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는 분명 그 백지를 보낸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테니까.
해가 이동하고 더 있다가는 저녁까지 먹고가라고 할 것 같아 모험가는 서둘러 포르탕 저택을 나섰다. 그래도 꽤 오래 신세지고 있었던 곳이라 그런지, 옛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자기 집처럼 편하게 적응하고 있어서 그대로 눌러앉을 뻔했다.
찾아가면 오르슈팡이 반드시 생각나서 못가겠다고 주저 앉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편한 장소가 되었는지. 혼자 복잡한 마음을 삼키며 포르탕 저택을 한번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차를 마시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편하게 시간을 보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러려고 이슈가르드에 온 게 아니었다. 본래 목적을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온 새하얀 편지, 이걸 보낸 사람이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야했다.
"근데, 확인해서 어쩌게."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쉴 시간을 가진 덕분인지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받은 백지가 진짜로 그 사람이 보낸 것이라고 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보낸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자 이름도 적지 않고, 내용도 텅텅 빈 상태로 보냈던 거였다. 오히려 가면 이전의 발렌티온 때 아무것도 적지 않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기입니다 하고 밝히는 거 아닌가. 자신이 받은 텅 빈 편지가 그 사람이 보낸 게 맞다 하더라도 그냥 받고 모른 척 있으면 될 일이었다.
오늘 하루 대체 무슨 헛수고를 한 걸까. 아니, 보석 홀장 거리도 갔고, 아르투아렐도 만나서 이야기도 했으니 영 헛수고를 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뉘엇뉘엇 져가는 해를 따라 어둠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시간. 꽤 차가운 바람이 상층과 하층을 잇는 계단에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제법 이슈가르드의 밤바람 같은 무거운 추위를 담은 바람이었다. 모험가는 몸을 살짝 움츠리고 팔로 몸을 감쌌다.
잊힌 기사 주점에서 따뜻한 음료라도 하나 사마시고 아파트에라도 돌아가 늘어지게 누워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다시 그리다니아에 찾아가 아스트리드와 리제트짱을 도와줘야지.
"……."
보고 있는 사람이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선명하고 쨍한 푸른빛 갑주는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금 이때엔 보기 적합하지 않은 의상인 것 같다고 모험가는 생각했다. 누가 보면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계단 위에는 모험가가, 계단 아래에는 아이메리크가 서 있었다.
모험가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멈췄다.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도망치기엔 너무 수상해보이고, 못 본 척 하기에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다 눈까지 마주쳤다.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험가는 들키지 않도록 이를 살짝 악물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놀랄 일이 아니다. 이슈가르드인걸. 총장님과 마주칠 수 있는 일이다. 모험가 스스로는 내심 티 안내고 잘 참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악물고 있는 것부터 전부다 들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슈가르드에 왔었군."
그에 반해 아이메리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살짝 놀란 느낌을 섞어 모험가에게 말을 걸었다. 모험가는 그 목소리에 그대로 속아 넘어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약간 볼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 어쩌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괜찮으면 이야기해주지 않겠나?"
"……아뇨, 총장님의 도움을 받을 것까진 없습니다."
"정말인가?"
"네.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정말 자신이 도와줄 것이 없냐는 질문을 꺼내지 못하는 한 사람과 어떻게든 자신이 편지 때문에 왔다는 걸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아 애쓰는 한 사람. 모험가가 어떻게든 표정을 숨기며 가벼운 인사를 하고 아이메리크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대로 돌려주면 성공할 작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던 걸까. 다음이 있다면 다른 방식을 시도해야겠다고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는 아이메리크의 발 밑에 하얀 봉투가 바닥을 쓸 듯 날아와 멈췄다. 아이메리크가 편지봉투를 들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험가가 있었다.
원래라면 예의가 아니기에 타인이 떨어트린 편지 봉투는 안을 확인해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발 밑에 떨어진 편지 봉투가 무엇인지 확신이 있었기에, 아이메리크는 망설임 없이 모험가가 보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하얀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새햐얀 종이를 꺼내어 고개를 돌려 모험가를 바라보며, 종이를 모험가에게 보였다.
"정말 내가 도와줄 것이 없는가?"
"아이메리크 총장님."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영웅공의 의문을 하나 혹은 둘 정도는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뇨. 이미 풀렸습니다. 그래요, 그 편지 아이메리크 총장님이 보내신 게 맞죠?"
"그래. 지난 발렌티온 때 상당히 감사한 편지를 받았으니, 답장을 보냈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모험가는 오른팔로 얼굴을 가려보았다. 이럴 때 대체 뭐라고 말을 하며 반응을 하면 좋을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잘 받으셨다니 다행이라고 웃었다가는 괜히 과대반응 하는 사람같아서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문제였다. 모험가는 헛기침 하면서 얼굴을 가린 팔을 내렸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어 모험가는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이메리크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곤란한 것 같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하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술이 나서 한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원 의장님을 칠 용기가 모험가에게 있을 리 없었다.
"마침 일이 마무리되어 저택으로 돌아갈까 생각한 참이었는데, 발렌티온 선물의 답례를 받아주지 않겠나."
"편지를 받은 건 제 쪽인데요."
"내가 받은 선물의 답례라기엔 초라하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식사 대접을 할 수 있게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나?"
모험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생각해봤자, 자신이 이슈가르드를 찾은 것 자체가 문제였다. 빈 편지를 보내버렸다는 후회가 알게 모르게 모험가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후회는 똑같이 빈 편지로 돌아온 답례를 보고 떠올라 모험가를 저절로 이슈가르드로 향하게 만들었다. 모든 일은 자신이 한 생각이고, 자신이 한 선택이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자신이 불러온 결과인데.
에스코트를 하며 걸어가는 아이메리크의 뒤를 따라 걸으며, 어떻게 표정을 관리해야 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보렐 저택에서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어차피 표정 관리는 하나도 하지 못할 미래가 아이메리크의 눈에도, 만약 이 모습을 제 3자가 봤다면 그 제 3자의 눈에도 훤했겠지만 모험가 혼자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험가에게 이번 발렌티온은 유난히 긴 이벤트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