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20화: 동경의 이면



  • 파이널 판타지 14(FF14) 칠흑의 반역자(5.3)
    의 네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3 이후의 시간대입니다.
  • 빛의 전사의 호칭은 '모험가' 와 '영웅' 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외견 묘사는 크게 하진 않고 있지만, 오리지널 설정이 다수 등장합니다.
    여성 캐릭터이며, 백마도사 주직 설정입니다.
  • 리퀘스트를 받은 글입니다.
    그라하x빛전 의 커플링을 베이스로 깔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 캐해석 차이, 설정 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상당한 날조로 쓴 글입니다. 본 글은 게임의 공식 설정을 따르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점이 불편하시다면, 뒤로 버튼으로 벗어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2023.07.06 포스타입에 업로드 했던 글)








다급한 연락이 들어온 것은 돌의 집에서 잠을 청한 사람들이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 슬슬 정신이 들 무렵의 오전이었다. 모처럼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바쁘게 무언갈 목표로 하지 않아 여유로운 수면을 취한 그들에게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날뛰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소리에 문을 열어 밖을 확인하자 팔을 위 아래로 한들며 어찌할 줄 모르는 타타루의 모습이 보였다. 타타루가 저렇게 당황할 정도면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했다. 눈을 떴을 때의 여유로움은 날아가 사라지고 굳은 표정으로 밖을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아, 여러분. 일어나셨군용!"


산크레드가 제일 먼저 준비를 끝마치고 문 밖으로 나와 말을 꺼내자 당황한 타타루가 놀란 목소리에 반가움을 섞어 입을 열었다. 눈을 뜨고 나타난 새벽의 사람들이 상당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지금 람브루스씨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당!"

"람브루스에게서?"


이어진 타타루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해당 이름을 가진 인물과 인연이 있는 그라하였다.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곧장 반응한 그를 바라보며 타타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곧 망설임도 없이, 뜸을 들이는 것도 없이 바로 연락받은 본론을 꺼냈다.


"모험가님이 쓰러지셔서 보호하고 계시답니당!"

"뭐?"


타타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모험가는 지금까지 온갖 강적을 상대해왔다. 그가 상처투성이가 되거나 쓰러진 모습을 새벽의 혈맹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일이 아닌 평소의 모험가가 쓰러졌다는 연락이 새벽의 혈맹에까지 흘러들어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곧장 뛰쳐나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라하 티아아였다.


"일단 내가 가볼게!" 


옷은 외출복을 입고 있었지만, 아직 몸단장이 끝나지 않았는지 머리는 제대로 묶지도 못하고 정리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건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야 모험가가 쓰러졌다는데 겉모습에 신경쓸 정신이 그라하 티아에게 있을리 없었다. 심지어 제 1세계에서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소식이 들어오는 걸까. 그라하 티아의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람브루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오히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쓰러졌다는 모험가를 보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람브루스가 일부러 새벽에 연락을 취했다는 건, 사람 손이 필요하다는 요청일 수도 있었다. 자신은 치유도 가능하니 빨리 가서 만약의 경우 치료도 할 수 있단 생각으로 발을 바삐 움직였다.


"잠깐, 나도 갈거야!"


아직 옷을 갈아입지 못한 알리제가 그라하 티아의 말을 듣고 소리쳐봤지만, 이미 그라하는 돌의 집 밖으로 뛰쳐나가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된 후였다.


"람브루스에게서 다른 이야기는 듣지 않았어요?"

"그게, 쓰러진 모험가님을 보호하고 있다는 소리만 들었어용."

"그렇다면, 겉보기엔 큰 부상이 없는 것 같군요. 만약 다쳤어도 그라하가 갔으면 문제는 없을 것 같으니 우리는 준비하고 가도 괜찮겠어요."


마음이 급해서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려는 알리제를 바라보면서 야슈톨라가 약간 느긋한 말투로 일부러 말을 꺼냈다. 알리제는 작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움직임이 야슈톨라의 말을 듣기 전보다 속도가 확실히 느려져 있었다.


"그래. 어쩌면 피로가 쌓인 걸 수도 있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제 1세계의 여파 일 수도 있고."


알피노의 말을 듣고 위리앙제가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원초세계로 돌아왔을 때까지의 모험가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지만, 제 1세계에서 그는 목숨이 위험한 수준까지 갔었다. 부디 그 영향이 아니기를 그리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치유가 다 끝났는지 람브루스가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보이는 건, 바닥에 누워있는 모험가와 람브루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라하 티아의 모습이었다.


"그라하, 어땠어? 도와줄까?"


그라하 티아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거의 뛰는 속도로 빨리 다가간 알리제가 말을 던지듯 급하게 꺼냈다. 가까이 다가온 알리제와 뒤에 따라서 오고 있는 새벽의 사람들을 본 그라하 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내가 일단 치유술은 사용해봤어. 그리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으니까."


굳은 얼굴로 뛰쳐나갔던 때와는 달리 풀어진 얼굴로 곤란하게 웃고 있는 그라하 티아를 보고 알리제가 바닥에 누워있는 모험가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어딘가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몸에 힘이 빠진 모습에 굳게 닫혀있는 두눈. 그리고 차분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움직이는 상체. 걱정할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자고있는거 아냐?"


그랬다. 산크레드가 말을 꺼낸 것처럼, 문제가 있다기 보단 모험가는 잘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옷도 얼굴도 부상을 입었다기엔 아무 문제 없이 깨끗했다. 무엇보다 눈을 감고 있는 모험가의 표정이 무척 편해보였다. 기절했다기보단 정말 편히 잠이 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모험가, 모험가. 일어나보게."


알피노가 모험가를 흔들어 깨워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몸이 흔들려도 모험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우리도 깨워보려고 했지만, 일어나지 않아."


알피노가 물러나자 알리제가. 그 다음으로 산크레드가 좀 격하다 싶을 정도로 모험가를 강하게 흔들어 깨워보려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뺨이라도 쳐야하나 말을 꺼낸 산크레드를 말린건 위리앙제였다.


"마물이 자주 출현하는 장소에 쓰러진 채 발견되어서 우리 사람이 데리고 왔다. 거기에 그대로 둘 순 없으니까. 깨어날 기미도 없고, 우리 쪽은 제대로 회복시킬 녀석도 없어서 연락했는데 괜히 놀래켰나?"

"아뇨. 보호해줘서 고마워요. 연락도 고맙구요.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있으면 단지 자는 것 같아도 연락 부탁할게요. 모험가는 우리가 데려가도록하죠."


야슈톨라의 말에 람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도와줘, 내가 업고갈게."


산크레드가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하자, 나머지 사람들이 모험가를 조심히 들어올려 산크레드의 등에 얹었다. 들어올리자 힘없이 움직이는 팔과 몸이 모험가의 정신이 깨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단순히 자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의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모험가를 등에 업고 일어난 산크레드를 보던 위리앙제가 다시 한 번 모험가의 상태를 확인해봤지만, 그라하가 말한대로 치유는 필요 없을 상태였다.


그라하는 람브루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그도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모험가를 등에 업고 돌아가는 새벽의 혈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람브루스는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별 문제 없겠지?"


그렇게 바라고 싶은 것인지, 자신이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예상인건지 알 수 없을 목소리로 람브루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새벽의 혈맹이 모험가를 등에 업고 나타나자 그 모습을 본 모르도나의 모험가들이 술렁였다. 술렁거림을 진정시키고자 빠른 걸음으로 돌의 집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문이 열리는 걸 보고 곧장 달려온 타타루가 등에 업힌 모험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아. 그냥 자고있는거야."


그라하 티아의 말에 안심을 하며 맞잡은 두 손을 가슴께로 올린 타타루였지만, 표정은 아직 밝지 못하고 어딘가 걱정이 남아있었다.


바닥이 아닌 침대에 모험가를 눕히자, 바닥에 누워있을 때보다 더 잘 자는 사람처럼 보여 맥이 빠졌다. 모험가가 원래 이렇게 잘 깨지 않는 편이냐고 누군가가 입을 열었지만,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모험가가 밤을 새는 모습을 본 적이야 많아도, 자는 모습을 본 적은 얼마 없었다.


그래도 그냥 자고 있는 것 뿐이니 금방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깨워도 일어나지 못할 뿐이지, 문제가 있는건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시간, 두시간, 다섯시간이 넘어가 아침에 발견한 모험가가 밤이 찾아올 때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고 조금씩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상이 있었던 건 아닌가. 혹시 그럴까봐 치유술을 써봤다. 이상은 없었다. 혹시 제 1세계에 갔던 자신들처럼 영혼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건 아닌가. 영혼은 제대로 이곳에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이런저런 답변이 나오면서 시간만 깊어져가고 있었다.


모험가가 눈을 뜨지 못한지 하루가 지났다. 몇몇 사람들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여러 서적을 뒤지고, 모험가를 봤다는 사람들의 목격정보를 모으면서 어째서 모험가가 일어나지 못하는지 알아봤다. 그러나 모험가를 봤다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고, 서적에서 비슷한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다.


이제 제 1세계 일도 끝나고, 모험가 안에서 언제 터질지 아슬아슬한 빛들도 사라졌다. 그라하 티아도 무사히 원초세계로 돌아왔고, 눈을 뜬 새벽의 혈맹의 몸에도 이상은 없었다. 모두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한 참에 일어난 사건에 모두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동요를 보이고 있는건 역시나 그라하 티아였다.


"그라하씨, 식사하세용."

"아, 타타루. 미안해, 챙겨줘서 고마워."


일어나지 않는 모험가의 옆을 지키며 그라하 티아는 책을 읽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모험가의 몸과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서적의 내용을 전부 연관시키며 정보를 찾았다. 모험가가 눈을 뜨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책을 잡은 그라하 티아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지만, 본인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도 잊어버리고 몰두한 그라하 티아에게 타타루가 가벼운 음식을 가져왔다. 약간의 빵과 가벼운 스프. 무거운 건 지금 입에 들어가지 않을 거란걸 알기에 신경써준 한상이었다. 그라하 티아는 웃으며 받아들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어제 아침 모험가를 데리고 왔는데, 벌써 이틀째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파란색을 더 부어 파란하늘을 오래 유지시켜 물들어가는 하늘에 밝은 시간을 더 묶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지 못하니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런 그들의 마음고생을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긴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지. 사흘째 아침. 모험가는 정말 잠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떴다.


"으응..."

"모험가?! 일어났어?"


천천히 눈을 뜨는 모험가의 모습을 보고 놀란 그라하 티아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소리를 들은 돌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방을 향해 달려왔다. 꽤나 큰 발소리가 들렸는데도 비몽사몽한 탓인지 놀라지 않고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난 모험가는 뒤늦게 침대 옆에 서있는 사람 무리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놀라다가 얼굴을 굳혔다.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퍼지자 그라하 티아는 뭔가 이상함을 느껴 조심스레 이름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아보았다.


"모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지만, 빠르게 깜빡이는 눈과 마주치치 못하고 피하는 시선은 누가봐도 낯선것을 마주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우물쭈물 주저하던 모험가는 조심스레 얼굴을 마주보며 작은 목소리를 꺼냈다. 늘 자신만만하게 떠들던 기억 속의 모험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세요?"


오래 잠들어 있었기 때문인지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 사이에 나왔다. 그러나 놀랍고 걱정되는 건 잠긴 목소리가 아니라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건 아는 사람을 향해 나올만한 단어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험가가 꺼낸 말에 당황하고 있을 때, 모험가 본인은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오른손으로 목을 살짝 잡고 고개를 내렸다.


"내가 아, 아니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어?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있어?"


그라하 티아의 말에 고개를 들고 가는 눈으로 경계를 하며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눈만 굴리며 모험가가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작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곳에 모험가가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보는 사람들, 처음보는 장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나 경계는 잊지 않은 모습으로 모험가는 이 장소와 새벽의 혈맹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작고 약해보여서, 든든하게 웃음짓던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얼굴임에도 알리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험가와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신의 기억과 다르게 연약하고 불안하게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그곳에 앉아있었다.


"놀래킨 것 같아 미안하네요. 당신, 모험가 맞죠?"

"네, 제가 모험가인데. ......실례지만, 누구시죠?"

"우리는, 아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게 낫겠군요. 사람은 몰라도 여기가 어디인진 알겠나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본 모험가는 당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돌의 집, 에오르제아에 있는 우리의 거점이에요."

"에오르제아? 제가 결국 에오르제아로 왔나요? 초코보 마차 타다 깜빡 잠들었나."


모험가의 마지막 말이 나온 순간, 그들은 모험가의 기억 속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새벽의 혈맹에 있는 사람들 모두 모험가가 에오르제아에 온 이후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에오르제아에 오기 이전의 모험가는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모험가는 정말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모험가이자, 자신들을 모르는 모험가였다.


다들 어느정도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적어도 눈을 떴다는 사실은 좋은 소식이었다. 그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고 어떻게 된건지 파악도 못한 채 있을 가능성이 컸다. 모험가의 몸이 상할 수도 있었다. 눈을 떴으니 식사를 챙길 수 있을테고, 기억을 잃어버렸단 사실을 알았으니 이것의 원인을 찾다보면 오래 쓰러진 이유 또한 이어져 밝혀지리라.


알피노는 알리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알피노의 얼굴을 본 알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위리앙제에게 말을 남긴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잔뜩 모여있는 건 부담이 될거란 생각에 모험가와 이야기 하는건 야슈톨라가 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 나가있기로 했다. 한사람 상대는 부담스럽지 않은지 야슈톨라의 괜찮냐는 질문에 모험가는 예상외로 흔쾌히 좋다고 답해주었다.


"알리제님과 알피노님은 혹시 근처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기술을 쓰는 마물이 있는지 확인 겸 람브루스에게 물어보러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타당하긴 하지. 그쪽은 그 둘에게 맡기도록 하고, 우리는 이제 어쩐다."

"타타루, 야슈톨라가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달라고 했어. 도와줄까?"

"괜찮습니당! 제가 당장 준비하겠습니당!"


타타루가 손을 번쩍 들고는 안쪽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방 안에선 침대에 앉아있는 모험가와 의자에 앉은 야슈톨라가 통성명을 시작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조금 경계하며 말을 조금씩 꺼내던 모험가는 지금 상황이 약간 익숙해졌는지 처음 눈 떴을 때보다는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타타루가 다과를 준비해 들고와 야슈톨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타타루가 들고 있는 다과를 받아들었다. 타타루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놀라서 눈만 꿈뻑이던 모험가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흔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모험가의 인사를 받은 타타루는 가벼운 걸음으로 방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마침 잘 됐네요. 뭐라도 먹으면서 더 이야기 할까요? 내보내놓고 미안하지만, 괜찮다면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시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요."


야슈톨라가 몸을 살짝 틀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야슈톨라의 시선을 따라 문을 바라본 모험가는 약간 웃음을 흘렸다. 문이 닫혀있었지만, 바깥에 누군가가 있는게 보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기척이 심하게 났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사실 사람이 많은 게 싫진 않거든요. 아깐 일어나자 마자 모르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있어서 놀랐는데, 야슈톨라씨는 나빠보이진 않으니까 믿을만 하겠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네요. 믿음을 배신하면 안되겠어요."


야슈톨라는 다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찻잔을 모험가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다는 가벼운 말과 함께 찻잔을 두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든 모습을 보고 야슈톨라가 닫힌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자 당황하는 남자 셋이 보였다. 짧은 대화 후에 문 밖에서 인기척을 내던 남자 셋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자리를 잡은 후 야슈톨라는 모험가의 기억 속에 가장 마지막에 남은 기억을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고, 차를 홀짝이던 모험가는 잠시 생각하다가 에오르제아로 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던게 가장 마지막 기억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자신은 아직 신참 모험가로 에오르제아에선 모험가 길드가 있고, 제대로 직업으로 인정받는다고 들어서 찾아오게 되었다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진짜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며 멋쩍게 웃는 모습은 낯선 모험가의 모습 중에서 새벽의 혈맹이 알고 있는 모험가의 모습과 가장 닮았었다.


들어온 세사람과도 통성명을 하고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다, 조심스럽게 모험가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모험가의 동료이며, 모험가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 모험가가 에오르제아에 온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전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은 에오르제아로 향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었는데, 뜬금없이 사실 넌 에오르제아에 오래 있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없을만도 한데 의외로 모험가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아?"


그라하 티아가 슬쩍 물어보자 모험가가 으쓱 어깨를 갸볍게 들어올렸다.


"그야 당장 믿기는 어렵죠. 그렇지만, 완전 불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면 그건 아닌거 같아서요. 정신간섭하는 마물에 당해 쓰러져 세뇌 당하다 정신 차린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이야기 자체가 불가능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니까요. 제 이야기가 맞다고 믿는건 다른 이야기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침착하게 받아들이는군."


산크레드의 말에 모험가는 후후 웃음을 흘렸다.


"신참이긴 해도 모험가이긴 했고, 일을 하긴 했으니까요. 그러면 온갖 이야기와 온갖 일들을 마주하거든요. 의뢰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나, 마물에게 당해서 미쳐버린 사람이나."


찻잔을 감싼 두 손을 내려다보던 모험가는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마냥 거짓말일거란 생각은 안드네요. 그치만, 동료라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꺼낼 정도로 '지금'의 나는 그다지 침착하지 않은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은 드네요."


말에 끝엔 약간 웃음소리가 걸렸지만, 찻잔을 내려다보는 모험가는 무얼 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미소짓는 입꼬리가 정말 웃고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그라하 티아는 문득 생각했다.


"이곳은 워낙 침착한 녀석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았을수도 있지."

"확실히 여러분들을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 제가 여러분 입장이었다고 하면 온갖 호들갑을 떨 것 같아요."

"그러겠지."


그라하 티아도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는 모험가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모험가는 복잡한 심정으로 웃고 있었다.


"혼란이 소용돌이 치는 상황 속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협력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저희는 당신의 기억을 되돌리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제 일인데 협력해야죠. 하고 안하고가 어디있겠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감사해야죠."

"그러면 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는 이녀석 그라하 티아와 함께 행동하지 않겠어?"


산크레드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산크레드에게 모였다. 그라하 티아 본인 마저 산크레드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듯 쳐다보았다.


"우리 중에서 가장 '사적으로' 모험가와 인연이 깊으니까 어쩌면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그런 방식을 취하자는 소리였군요. 그러네요.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과 반복 접촉하여 기억을 떠올렸다는 사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해볼 가치는 있겠어요."


농담일까, 장난일까 생각했지만 야슈톨라마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저 웃으며 넘길 순 없을 것 같았다.


"나, 는 상관 없지만. 모험가는 어때? 나랑 다녀도 불편하진 않겠어?"


그라하 티아는 두 사람을 쳐다보는 도중에 흘깃흘깃 모험가를 쳐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에 있어도, 어디에 누구와 있어도 불편할 것 같아 오히려 상관 없을거 같아요."

"솔직하네. 그러면 방법을 찾을 때까진 그라하가 모험가를 데리고 대도시를 가보는 건 어때."

"에오르제아의 대도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모험가의 흥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걸 들은 이상 모험가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그라하에겐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모험가에게 있어서 에오르제아의 대도시는 미지의 장소일 것이고, 그 미지의 장소를 생각하며 가슴 뛰는 모습은 자신이 아는 모험가가 맞았으니까.


"좋아. 너만 괜찮다면 내일부터 나가지 않을래? 우선, 커르다스를 지나게 되겠지만 그리다니아부터 가보자."

"저는 이곳 지리를 잘 모르니까 그냥 따라갈게요."

"결정됐네요. 그럼 그라하 티아와 모험가가 돌아도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정보를 찾고, 돌아온 이후에는 정보를 이용해 치료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해요."


모험가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는 모험가에게 가볍게 돌의 집과 새벽의 혈맹의 사람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점심이 지나자 돌아온 알피노, 알리제와 인사를 나누고 아까 나눈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라하 티아는 알리제의 따가운 눈쌀을 받아야 했지만, 다들 납득한 채 이야기가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기억을 잃은 것 치고는 모험가는 침착해보였고, 지금 상황에도 금방 적응했다. 타타루와도 금새 말을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고, 돌의 집에서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낯선 장소에 금방 적응하는 건 모험가의 특성인지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크리스타리움에 처음 왔을 때도 생각보다 금방 적응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모험가를 바라보고 있던 그라하 티아와 시선에 고개를 획 돌린 모험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안해, 신경쓰였어?"

"아니, 그건 아닌데요. 음, 잠깐 앞에 앉아도 될까요?"


타타루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제일 처음 눈 떴을 때 우르르 모여 있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은 탓인지 아직 낯선 모양으로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었다. 모험가의 존대라니 드물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낯간지럽게 느껴졌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이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본인이 편한게 중요했으니까.


그라하 티아의 동의를 얻자 모험가는 곧장 그라하 티아의 앞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끌지 않고 살짝 들어올린 후 빼서 앉는 버릇까지. 이런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건 변함이 없었다.


"산크레드씨가 하신 말이 조금 궁금해서요."

"응?"


뭐라고 했었지. 잠깐 생각하던 사이에 모험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적으로 가장 친하다고 해서."

"아, 그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그렇다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단 생각에 그라하 티아가 말을 더듬었다.


돌의 집에서 대놓고 그렇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었고, 모험가와도 딱히 그럴듯한 물건을 주고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돌의 집 사람들이라면 알게 모르게 모험가와 그라하 티아의 사이를 알고 있었고, 물건은 주고 받지 않았지만 말까지 주고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말을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대놓고 그렇다고 말할 만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정말 만나고 있다고 확실하게 밝힌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적으로 가장 친하다는 말은 산크레드 나름의 신경써준 표현이었겠지. 꼭 사적으로 가장 친하다는 게 그런 관계란 소리는 아니었고, 모험가의 성격상 자신에게 연인 관계의 사람이 있다고 듣는다면…….


"혹시 제가 생각한, 만나는 사이라는 해석이 맞나요? 정말로?"


그래. 이런식으로 믿지 못한다는 반응이 나올게 뻔했으니까. 가뜩이나 기억을 잃어서 동료란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연인이라고 들으면 오히려 믿지 못하고 돌의 집을 뛰쳐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믿어줄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모험가의 부담이 되고싶지 않다는 마음도 들었다. 입을 여는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그라하의 입 밖에 나온건.


"그냥 우리가 가장 친하다는 의미로 한 걸거야."


누구나 꺼낼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받아들인건지 아닌건지 알 수 없는 흐음 하는 소리만 내던 모험가는 알겠다고 깔끔하게 답했다. 믿든 안믿든 지금 상황은 자신의 말대로 이해하고 넘어가주려는 듯 더이상 우리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면서 한편으론 아쉬운 느낌이 드는 건 그라하 티아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금방 다른 사람들과 친해진 모험가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대로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도중에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형편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 그라하 티아가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모험가는 일어나서 준비를 다 끝마친 상태였다. 원래 이렇게 아침이 이른 사람이었던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는 모험가의 모습은 기억 속 그대로였지만, 아침의 서늘한 공기속에 저 모습을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이 이르네."

"원래 이렇게까지 이르진 않아요. 그냥 눈이 일찍 떠지더라구요."

"......낯선 장소여서 그런걸지도 모르지. 그런 곳에선 잠을 자도 편히 못자니까."

"어쩌면 어제 깜빡 낮잠을 자서 그런걸지도 모르죠."


모험가가 바라보고 있는 그라하 티아의 표정이 어땠는지, 모험가는 신경써서 그라하 티아의 이야기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다. 오히려 신경써야 할 쪽은 자신인데 생각이 든 그라하 티아는 쓰게 웃으면서 나갈 준비를 하겠다며 모험가에게 등을 보였다.


준비를 끝마친 채 나가려는 두 사람을 본 타타루가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지만, 둘 다 거절했다. 식욕이 없다는 답마저 똑같았지만, 정말로 식욕이 없어보이는 건 그라하 티아 뿐이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용!"

"다녀올게~"


오랜 친구처럼 가볍게 손을 흔들며 타타루의 인사를 받아주는 모험가를 보며 그라하 티아는 먼저 돌의 집의 문을 열었다.


어제 그리다니아로 향하기로 결정하고, 그라하 티아는 가는 길을 지도로 다시 확인했으며 야슈톨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 중 하나를 모험가에게 빌려주었다. 가는 길엔 자잘한 마물들이 많았고, 그라하 티아 혼자라도 문제는 없을테지만 만약을 위해서였다. 신참일 때의 기억이긴하지만 모험가라는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니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을 갖고 있는게 안심이 되기도 할테고.


제대로 무기를 들고 온거겠지 생각한 그라하 티아가 모험가가 등에 맨 지팡이를 확인해보았다. 확실히 지팡이는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한 모양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야슈톨라가 착각해서 다르게 줬을리는 없었다. 야슈톨라도 이전엔 환술사였으니, 백마도사인 모험가에게 다른 지팡이를 잘 못 줄리 없었다.


그러나 모험가가 등에 매고 있는 지팡이는 환술용 지팡이가 아니었다. 백마도사와 흑마도사 모두 사용할 줄 아는 그라하 티아는 모를레야 모를 수 없었다. 저건 주술용 지팡이었다.


"그라하 티아씨? 안가세요?"

"아니, 갈 건데……. 아니야. 가자."


어차피 모르도나에서 그리다니아까지의 길은 그라하 티아 혼자 모험가를 호위하지 못할 길은 아니었다. 무기를 준 것도 만약을 위해서였으니, 쓸 일이 없을테고 상관 없겠지. 모험가가 실수로 지팡이를 잘 못 들고왔다고 해도 자신이 대처할 자신이 있으니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그라하 티아는 길 안내에 집중하기로 했다.


커르다스 중앙고지를 넘어, 새하얀 설원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험가에게 눈구경을 잠시 시켜주고 가을박 마을을 향했다. 가는 도중에 마물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다행히 위협적인 마물은 없었고 그라하 티아가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마물들 뿐이었다.


검을 들고 마물을 처리하는 그라하 티아의 뒤에서 모험가가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고 칭찬하기를 몇번. 가을박 마을에 도착해 잠깐 물을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낯선 길이 무섭진 않고 신기한지 물을 마시며 쉬는 잠깐 사이에 신난 모험가가 이곳까지 오는 감상을 그라하 티아에게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모험가의 그런 감상이 싫진 않았으니 그라하 티아도 일일이 맞장구 쳐주며 들어주고 있었다. 평소에 이런 생각,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겠구나 생각을 할 기회이기도 해서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모험가 본인은 생각을 표현하는게 서툴다 말하지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건 단순히 눈치보면서 말을 삼간거겠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기회도 되었다.


"지치진 않았어?"

"전혀요!"


신나서 자리에 일어나는 모험가를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체력이 좋네. 라고 가볍게 말하자 모험가니까요! 라는 답마저 그라하 티아가 알고 있는 모험가가 할만한 답변이었다. 남은 이야기는 걸어가면서 하자며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리다니아까진 얼마 남지 않았어. 좀만 더 가면 돼."

"에오르제아 대도시!"

"그 중 하나지. 너에게 그리다니아는 굉장히 익숙한 도시일거라 어쩌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을지도 몰라."

"그런가요? 그리다니아가 주요 활동 도시였나?"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그런 것 같아. 새벽의 혈맹에는 예전에 파파리모와 리세가 있었는데, 그 둘이 그리다니아에서 활동했거든. 넌 그 둘에게 추천받아서 새벽에 들어온 셈이니까."

"그렇군요."

"게다가 그리다니아에는 환술사 길드가 있거든. 네가 자주 찾았을테니까, 그리다니아가 중심이 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네? 제가요?"


놀란 모험가의 목소리에 그라하 티아도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려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모험가를 바라보는 그라하 티아와 모험가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네가 환술사 길드에 자주 찾아가는 건 당연한거 아니야?"

"저는, 딱히……. 환술에는 관심이 없는데요."


그라하 티아가 기억하고 있는 모험가는 백마도사였다. 노아의 일로 처음 만났을 때도 백마도사였고, 제 1세계에서 재회했을 때도 모험가는 변함없이 백마도사였다. 그런 모험가가 환술에 관심이 없다니?


"그,러면 지팡이는?"

"아, 환술 지팡이랑 착각하셨구나. 저 주술사거든요. 주술 지팡이에요, 이거. 야슈톨라씨가 빌려주셨어요."


모험가가 주술사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모험가가 에오르제아에 오기 전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렇구나......"

"네."


'내가 알고 있는 너는 백마도사였어.' 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라하 티아가 알고 있는 영웅은 하얀 로브가 잘 어울리는 백마도사였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저 사람은? 분명 동일인물 이었지만, 그는 백마도사는 커녕 환술에 관심조차 없는 주술사였다. 그런 그에게 마치 환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그라하 티아씨?"

"아, 아니. 사실 이쪽으로 가면 코 앞에 환술사 길드가 있어서 관심이 있으면 들렸다 갈까 하고 말하려고 했었거든. 착각해버렸네."


말이 정돈되지 않고 횡설수설 하고 목소리 크기도 일정하지 못한 누가 들어도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나 모험가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않은 것인지 신경써서 그냥 넘긴 것인지 웃으면서 그라하 티아의 말을 들어주었다.


"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지팡이들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요, 비슷하게 생겼으니 착각할 수 있죠. 저도 가끔 착각해요."

"응, 그래......"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라하 티아의 발걸음에 무겁진 않지만 걸리적거릴 정도의 무게로 걸렸다. 그런 그라하 티아의 뒤에 따라오는 모험가의 걸음은 가볍고 산뜻했다.


그라하 티아는 고개를 저어서 잡생각을 떨치고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에오르제아에 대한 기억을 잃은 모험가가 에오르제아에서 만난 자신이 모르는 사람인건 당연한거였다. 그래, 지금 이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했다.


머지않아 그리다니아의 관문이 보이고, 어렵지 않게 문을 통과 할 수 있었다. 우거진 나무에 둘러싸여 정령과 공종하는 도시, 그리다니아. 일반인들이 자연에 가까운 도시를 떠올려보라 할 때 제일 쉽게 떠올릴법한 녹림이 우거지고, 흙으로 된 길이 나있는 자연 느낌이 나는 도시였다.


약간 좁은 길을 지나, 코 앞에 보이는 환술사 길드 마저 지나 그리다니아 구시가지에 다리가 보이는 넓은 장소까지 나오니 모험가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바빴다.


"여기가, 그리다니아군요."

"그래. 어때, 낯은 익어?"


그라하 티아의 말을 듣고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참을 두리번 거리며 구경을 하던 모험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느낌은 안들어요. 처음이에요."

"그런가. 좀 돌아다니다보면 기억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구경해볼까?"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고 눈을 빛내며 살펴보는 모험가를 지켜보는 그라하 티아의 눈동자 또한 빛나고 있었고, 끊어질게 분명한 잠깐의 정적 속에 기대가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 기대가 보답받지 못한 순간 실망의 표현이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라하 티아 본인은 실망한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 떠올리지 못하는 것 모두 모험가의 잘못이 아니었다. 떠올리면 좋겠다는 자신의 바람마저 자신의 욕심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모험가와 눈이 마주쳐 심장이 점차 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티가 났던걸까. 입을 다물고 큰 표정의 변화 없이 자신을 비출 듯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약간 사냥감을 노리는 모습같기도 해 그라하 티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왜?"

"아니에요.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긴 말을 하면 목소리가 떨릴까봐 짧게 말을 꺼내니 모험가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노려지던 기분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졌다. 모험가 또한 사냥꾼이 아닌 평범한 사람 한명이 서 있는 모습이 되었다.


우선 칼라인 카페를 가자고 계획을 짰다. 그곳은 모험가 길드이기도하니까. 모험가라면 늘 그곳에 갔을테니, 익숙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신참 모험가라면 당연히 에오르제아에서 가장 흥미가 있을 곳은 모험가 길드겠지. 거기에 그라하 티아도 모험가 길드에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라하 티아의 길 안내를 받아 광장을 지나 칼라인 카페에 들어섰다. 들어가자 안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이미 모험가를 알아 본 모양이었다. 옆에 그라하 티아가 같이 서 있어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수근거리는 소리와 손으로 모험가를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을 금방 볼 수 있었다.


뮨이 반갑게 인사하고자 자리에서 나왔지만, 마치 처음 온 사람처럼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는 모험가의 모습을 보고는 약간 이상한지 웃던 얼굴을 굳히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다 옆에 있는 그라하 티아의 모습을 보고 슬쩍 그의 이야기로 모험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웬일이야, 동료하고 같이 오고."


모험가는 놀라는 모습도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 뮨을 올려다보았다. 깜빡이는 두 눈은 누가봐도 아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험가?"


뮨이 한번 부르자 그제야 살짝 당황한 듯 표정을 바꾸더니 손을 입주위로 가져갔다.


"아, 아뇨. 저를 아시는 것 같아서 어떻게 답을 해야할까 고민했습니다."

"그야, 너는 모험가이고 나는 모험가 길드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알지. 널 등록한 것도 나였는걸."


처음 그리다니아에 와서 카페에 발을 내딛던 신참 모험가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말을 하자 묘하게 지금의 모험가가 그때와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아, 모험가 길드의 분이셨군요. 반갑습니다. 그,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시선만 살짝 움직여 그라하 티아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맞은 그라하 티아는 고민하는 모습도 없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리에 앉을래? 차라도 하고 가."


뮨이 손을 뻗어 빈 자리를 가리키자 그라하 티아가 그러는게 좋겠다고 맞장구쳤다. 모험가도 웃으며 좋다고 답을 하며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그라하 티아는 따라서 앉지 않았다.


모험가 길드의 일을 하면 온갖 상황과 이야기를 듣게 된다. 파티를 맺었다가 전멸하게 된 모험가들의 이야기. 의뢰를 수행하다가 마물에게 연인을 잃어버린 모험가의 이야기. 마물의 정신 마법에 당해서 기억을 잃어버렸거나,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듣고는 했다. 그러니 뮨에게 이런 상황이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대상이 대상인 만큼 놀란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지만.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작은 한숨을 내쉬는 뮨의 곁으로 그라하 티아가 다가갔다.


"저번에 같이 왔던 모험가의 동료지? 무슨 일이 있었어, 기억을 잃은거야?"

"어떻게 된건진 우리도 몰라서 알아보고 있어."

"그래. 단독 행동을 하다가 일어난 일이구나. 방심했어. 이래서 모험가는 단독 행동말고 파티 행동을 추천하는데, 사람이 사람이다보니까 모험가는 그래도 괜찮겠다고 생각한게 문제였네."

"그래서 말인데, 모험가는 나에게 의뢰가 있다고 말한 후 기억을 잃고서 발견되었거든. 혹시 모험가가 받은 의뢰가 뭔지 알 수 있을까?"


받은 의뢰가 무엇인지. 토벌 의뢰라면 그 마물에게 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기억을 잃게 된 원인과 해결방법을 찾기도 쉬울터였다. 그러나 뮨은 기대와 저 반대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쪽을 통해서 모험가가 받은 의뢰는 없어. 새벽의 혈맹 사람들도 쓰러지고 돌아온지 얼마 안됐는데, 다른 일로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렇구나. 답변 고마워."

"아니야. 모험가가 저렇게 된 모습을 보니 좀 충격이긴 하네. 빨리 방법을 찾길 바랄게. 나도 가능한 정보를 모아볼게.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고마워. 나도 동감이야."


둘은 동시에 모험가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모험가는 신기해하며 카페 안을 둘러보고, 나무로 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촉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빛나는 눈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말 이곳에 처음 왔을 때랑 똑같은 모습이네. 처음 왔을 때도 저랬는데."


추억에 잠긴 목소리에 말끝에 씁쓸함이 담긴 뮨의 감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차는 금방 내줄테니 느긋하게 있다가 가. 여관에도 미리 말해 둘테니까 묵고 가려면 여관을 쓰고."

"신경써줘서 고마워. 그럼 필요할 땐 사양않고 쓸게."


뮨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별거 아니라며 차를 준비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라하가 천천히 모험가의 곁으로 가 반대편 자리에 앉자 약간 신난듯 상기된 표정의 모험가가 이야기는 마쳤나며 웃었다.


"재미있어보이네."

"상상하던 것 보다 훨씬 숲 느낌이 나는 도시라서 나도 모르게요."


멋쩍게 뒷머리를 매만지며 말하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들뜬 목소리였다. 기억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즐겁기는 한 모양이니 이번 안내는 성공이라고 생각해도 될 법했다. 차를 마시다가 모험가의 배에서 울리는 시계에 그대로 식사도 마치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라인 카페에서 시작해 광장을 지나 다시 그리다니아의 안내를 시작했다. 카페와 광장에서 금방 볼 수 있는 목수길드와 구시가지 쪽으로 넘어가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시장의 위치나, 시장과 가까이 있는 가죽공예가 길드. 평소엔 사람이 드물어 쉬기 좋은 폭포나 창술사 길드 등 설명을 듣는 모험가는 언제나 즐거워보였기에 설명해주는 사람도 설명할 맛이 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보던 두 사람은 어느새 노을지는 하늘을 보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뮨은 여관을 사용해도 된다고 말해주었지만, 저녁엔 다같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며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으니 이만 돌의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아쉽네요."

"괜찮아. 다음에 다시 오면 되잖아?"

"다음……."


아쉬움을 숨기지 않은 모험가에게 그라하 티아는 말했지만, 모험가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그라하 티아가 꺼낸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늘 하루종일 그랬들이 그라하 티아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돌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 모르도나로 가기로 했고, 환술사 길드를 지나가는 그라하 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힐끔 길드를 쳐다보고 그리다니아의 관문 밖으로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사실 환술사 길드에 갔으면 했죠?"


어두워지기 전에 모르도나에 도착하는게 가장 안전할테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가을박 마을을 막 지났을 무렵에 모험가가 입을 열었다.


"응?"

"그라하 티아씨 말이에요."


그라하 티아가 발걸음을 멈추자 따라서 모험가도 걸음을 멈췄다. 벌레우는 소리가 귀를 찌르듯이 울려퍼지는 저녁노을 속에 힘없으면서 아련한 모험가의 미소가 보였다.


"사실 그라하 티아씨는 제가 환술사 길드에 갔으면 했죠?"

"아니, 그건 아닌데……."

"그라하 티아씨가 좋아하신 저는 환술사였나요?"


그라하 티아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모험가의 물음에 답을 하는 행동을 보였다. 당연히 그럴거라 생각했는지 모험가는 놀라지도 않고 표정의 변함없이 그라하 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움직여서일까 아주 약간 얼굴에 그림자가 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것 같았어요."

"내가 기억하는건 환술을 쓰는 모습이었어, 주술을 썼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서 그렇지 환술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건 아니야."

"그렇지만, 아는 모습대로 행동하길 바랐죠?"

"모험가."

"괜찮아요. 만약 친구가 기억을 잃었는데, 내가 모르는 모습만 보인다고 한다면 저도 같은 반응일거라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그라하 티아씨가 기억하는 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지금의 네가 신경쓸 일은 아니야."

"그렇지만 그렇게 되길 바라잖아요? 환술을 쓰고, 모르는 장소를 찾아가는 걸 좋아하며, 사람들과 금방 친숙해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언제부터 알아챘던걸까. 처음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눈치채기 시작한걸까.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 입 밖으로 꺼내 되돌려주는 모습에 그라하 티아는 살짝 이를 악물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사실이다. 지금의 모험가의 모습을 보고 기억을 잃기 전과 같다 다르다 판단한 것도 사실이었다.


"너는 그대로 있으면 돼."

"거짓말쟁이."


장난식으로 웃으며 말을 한 모험가였지만, 꺼낸 단어는 진심이었다. 알고있어도 그라하 티아는 귀여운 장난을 받은 사람마냥 웃으면서 모험가의 말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돌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자잘한 대화가 오고 갔지만, 둘다 진심으로 궁금하거나 필요해서 꺼내는 말이 아닌 단순히 정적을 부러오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내뱉는 용도로 말을 사용할 뿐이었다. 주고 받은 이야기가 적지도 않았는데, 돌의 집에 도착하자 마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둘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무게 없이 날아갈 가벼운 대화였다.


돌의 집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반기는 와중에 사람들은 그라하 티아를 쳐다보았다. 그라하 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도 별로 이렇다 싶은 정보를 찾지 못한건지,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상의하고 모험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저녁 시간이 그리다니아를 방문한 모험가의 감상을 듣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신나서 말을 잇는 모험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거나, 정보를 덧붙여주며 시간은 깊어갔다.


그라하 티아는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도중에 돌의 집을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폐에 들어와 정신을 차리게 하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모험가가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모험가가 자신을 모른 채로 모험가가 살고, 자신이 떠나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기억을 잃어버린 모험가를 보고 멋대로 기대하고 또 멋대로 실망하는 자신을 보고 있자니 옞전의 각오는 다 어디로갔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모험가가 살아있어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잃은 모험가에게 자꾸 자신이 동경하는 영웅을 찾고 있었다. 알게모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영웅을 따라가길 바라고 있었다.


기억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지만, 정말 만의 하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그가 목숨을 잃은 것에 비하면 나은 일이었다.


근데 그러면. 자신은, 에오르제아에 온 기억을 영영 잃어버린 모험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말 '내가 동경하는 영웅'의 모습을 찾거나 따라하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너는 분명 여기 있는데, 자꾸만 나의 영웅은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서.


속에 쌓아놓은 진심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가슴에 뭉쳐있던 답답함을 꺼내온 듯 묵직한 날숨을 내뱉었다. 밤공기의 싸늘한 기운이 묵직한 날숨 대신 가슴에 차올라 답답함이 채웠던 자리를 가볍게 바꾸려고 했다. 이내 마음의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들이마신 차가운 밤공기마저 답답함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돌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고. 그라하 티아를 발견한 알리제만 다가와서 뭔가 정보 얻은거 없었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답변만 되돌려줄 수 있었다.


다음날이 되어 그라하 티아가 모험가를 찾았다. 원래라면 어젯밤에 하루 쉴지 아니면 울다하나 림사 중 어디를 갈지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답답한 마음을 달래느라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아침에 눈을 뜨자 생각이 나 곧바로 모험가의 모습을 찾았으나 돌의 집에선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험가를 찾기 위해 돌의 집에서 나오자, 당황해하는 다른 모험가 일행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마물 무리를 발견해서 도망쳐왔는데, 무리가 쫓아오는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영웅님께 도움을 요청했으니 괜찮겠지?"

"그치만 상태가 좀 이상해보였는데, 괜찮을까?"


모험가 일행의 말을 듣고 그라하 티아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영웅이라니 그 '모험가'말야?"

"네, 밖에 계시기에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좀 망설이시긴 하셨는데 큰일이라고 말하니까 가주시긴 했으니 괜찮긴 할겁니다."


모험가 일행의 동료가 보고를 한건지 마침 모르도나에 귀를 찢는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마물 주의의 경고음이었다. 그라하 티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어디냐고 물었고, 모험가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망설임없이 뛰었다.


모험가가 평소의 모험가였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험가는 에오르제아에 온 이후의 기억을 전부 잊어버린 상태였다. 마물 무리를 가볍게 해치우는 실력이 지금의 모험가에게 있을리 없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말랐다. 숨이 차올랐지만, 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불안감이 멈추지 않았다. 검과 방패를 들고 마물 무리를 찾자마자 곧바로 달려든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다 못해 멈춰 버린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모험가였다. 저 머리카락과 야슈톨라에게 빌렸다는 저 지팡이를 그라하 티아가 못알아 볼 리 없었다. 검을 휘둘러 마물을 공격하거나 쫓아내며 겨우 가까이 다가가자 다행히 숨을 쉬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다행, 이야."


부상의 정도도 커보이진 않았다. 이정도면 다 정리하고 자신이 치유하면 부상을 입었단 흔적도 없을테지. 검을 잡은 그라하 티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가면 유연한 상대를 하지 못하게 된다. 마구 달려오는 마물들은 가볍게 방패와 검으로 상대할 수 있지만, 기습을 노리는 마물에겐 대처하지 못하고 자꾸만 한대 두대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자기 혼자 있는거면 상관없겠지만, 지금 그라하 티아의 주변엔 쓰러진 모험가도 있었다. 마물의 적개심을 올리며 모험가를 지키고, 마물까지 쓰러트려야했다. 공격 역할의 일행이 있다면, 이때 대신 공격해서 마물을 쓰러트려줄테니 상황이 안정적일텐데, 자신도 모르게 도움을 바라던 순간 빈틈이 생겼다.


적개심 관리를 못한걸까, 아니면 새로 달려든 마물인걸까. 알 수는 없었다. 단지 그라하 티아의 시선에서 벗어난 마물 하나가 모험가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그걸 뒤늦게 발견한 그라하 티아가 몸을 던졌지만, 제대로 대응은 하지 못하고 공격을 맞은 채 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모르도나에 종소리가 울렸으니 모험가들이 올지도 몰랐다. 그럼 그때까지 얼마나 버텨야 할까. 자신도, 모험가도 안전하게 버틸 수 있을까. 손에 힘을 줘서 땅을 밀어내며 그라하 티아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라하 티아의 뒷목을 붙잡고 그를 뒤로 집어당겼다.


벌써 모르도나에서 사람이 왔나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건 모험가였다. 자신보다 바닥에 쓰러진 모험가를 빼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라하 티아의 붉은 눈에 비치는 등은 낯선이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저리 안가?"


뒷목을 잡혀 던져지는 순간 놓친 방패를 들어올린 그는 큰 목소리를 내지르며 방패를 휘둘렀다. 방패는 무기로 쓰기엔 좋지 않을텐데도 휘두른 방패에 얻어맞은 마물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 상태에서 다른 손에 든 지팡이로 그 사람은 주문을 외웠고, 커다란 불길이 마물들을 휩쓸면서 터져나갔다. 화려한 주술사, 아니 흑마도사의 기술이었다. 마물들은 마법 하나에 성인 엘레젠의 키보다 더 먼 거리를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위기의 상황일 때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해주고, 존경의 눈빛을 받는 사람.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의지를 차오르게 만드는 그런 사람. 불리한 상황도 뒤엎을만한 분위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


뒤에서 나타나 자연스럽게 선봉을 잡고, 수많은 사람들이 뒤를 향할 때 등을 보이며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책 속에 적힌 그야말로 '영웅'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자신이 가장 동경하는.


"늦어서 다친건 아니지?"


마물 무리와 그라하 티아의 사이에 선 모험가는 따지자면 늦은 편이었음에도 제시간에 등장한 사람 마냥 의기양양하게 바닥에 앉은 그라하 티아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은 평소에 입고 다니던 백마도사 의상은 아니었고,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 또한 주술용 지팡이었으나 그는 확실히 '영웅' 이었다.


"뭐가 이렇게 몰렸대. 일어날 수 있겠어?"

"응, 괜찮아. 잠깐 방심해서 쓰러진거 뿐이니까."

"그러면 빨리 싹다 정리하고 상태 봐줄게."

"나도 내 치유정도는 할 수 있거든."


나눈 대화는 별 내용없는 이야기였고, 어떻게 싸울지에 대한 내용은 주고받지 않았으나 주고받는 시선만으로 충분했다. 두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싸워온 것은 아니었으나, 함께 싸운 시간은 누구보다도 가득차 있었다. 서로 어떻게 싸우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움직임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그라하 티아는 방패와 검을 다시 들어 앞으로 뛰쳐나갔다. 주술을 쓰는 건 꽤나 오랜만일텐데도 모험가는 익숙하게 마물들을 공격해나갔다. 환술에 비해 공격적인 주술을 쓰다보니 예상보다 마물들을 금방 정리 할 수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마물을 본 뒤에 있던 마물들이 도망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것도 한몫했다.


갑자기 깨어나 기습을 할 수 있으니 제대로 쓰러트린게 맞는지 확인을 하던 모험가는 확인을 끝마친 뒤 곧바로 그라하 티아의 곁으로 다가와 치유술을 썼다.


"내가 할 수 있다니까."

"백마도사 두고서 뭐 해먹으려고 냅둬."

"나도 백마도사인데?"

"지금은 방패랑 검 들었으니까 나이트지. 왜, 관용이라도 쓰시게?"


장난스러운 웃음과 말투. 거짓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눈매로 호를 그리는 부드러운 미소. 이 분위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았다.


"기억이 돌아왔어?"

"그렇지. 일어날 수 있겠어?"


주저앉은 그라하 티아를 향해 손을 뻗는 모험가. 망설임없이 그 손을 꽉 잡고는 그라하 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이 손을 놓는 것이 무서워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모험가가 뻗어준 손을 놓지 않고 잡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적은 많지만 지금까지 하지는 않아."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왜 기억을 잃어버린건데."


시선을 위로 옮기며 그라하 티아가 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턱과 볼을 매만지며 모험가는 말을 찾고 있었다.


"일단, 일을 다 정리하고 나서 이야기하자."


자신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고 해맑게 웃는며 꺼낸 모험가의 말에 그라하 티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엔 없었다.


모르도나로 돌아가 모험가에게 부탁을 한 일행에게 마물들을 다 정리했다는 말을 알리고, 모르도나는 다시 안전해졌다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무기를 꺼내고 긴장하고 있던 모르도나에서 지내는 모험가들이 소리를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각기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돌아갔다.


소식을 늦게 듣고 마물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던 새벽의 혈맹이 모르도나로 돌아오는 두 사람을 보았다. 괜찮냐는 말과 함께 달려오는 그 모습을 모험가는 뭐가 즐거운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괜찮아?!"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알리제가 모험가에게 뛰어갔다. 알리제의 목소리에 따라 알피노가 알리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불려서야 아차 싶었는지 눈을 크게 뜬 알리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미안하다는 말을 곧바로 꺼냈다.


"괜찮아, 미안할게 뭐가 있어. 알리제의 걱정을 사다니, 나도 조금 녹슬어버린걸까."


주술사 지팡이를 들고서 이리저리 돌리며 쳐다보던 모험가가 지팡이를 등에 매며 말을 꺼냈다. 누가봐도 낯선 사람에게 할만한 말투가 아닌 말. 무엇보다 너무 자주 들어 익숙한 단어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새벽의 사람들 중에 제일 먼저 모험가의 말을 이해한 알리제가 모험가의 어깨를 붙잡았다.


"기억 돌아왔어?"

"걱정끼쳤구나, 미안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사람 걱정이란 걱정은 다 시키고 태연하게 나타날 줄이야."

"에이, 호들갑 떠는 것보단 낫잖아?"

"정말 잘됐어. 이대로 큰 문제가 되는 줄 알았네."

"그래서 어쩌다 이렇게 된건지는 설명해줄거죠?"

"아, 이야기 하자면 긴 것도 같고, 짧은 것도 같고."


얼버무리는 모험가를 데리고 일단 돌의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쩌면 도중에 도망칠 수도 있겠다는 산크레드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라하 티아 또한 동의하였고, 모험가는 라하라며 이름을 불렀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모험가의 어리광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건 그라하 티아가 가장 컸으니까.


상황 설명을 마치고 새벽의 혈맹에게 온갖 잔소리로 얻어맞은 모험가는 로웨나 상회 건물 2층 테라스에 앉아 입술을 쭉 내밀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를 가지고 온 그라하 티아가 웃으면서 모험가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제 1세계 갈 때엔 조심해."

"내 잘못이 아닌데~"

"픽시족의 장난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조심하지 않았던 것도 잘 못이지."


모험가가 받았다는 의뢰의 주인은 제 1세계에 사는 픽시족이었다. 꿈의 세계를 담당하는 픽시족들에게 의뢰를 받았는데, 그만 모험가가 깜빡 잊어버리고만 것이었다. 거기에 일 메그를 방문할때마다 페오를 만난다는 것도 잊어버린 모험가였기에, 요정왕 페오를 포함한 픽시족들이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망각의 저주는 그렇게 픽시족들에 의해 모험가에게 내려졌고, 제 1세계의 성견의 방을 통해 원초세계로 돌아온 모험가에게 발동되어 정신을 잃어버리고만 것이었다.


"이미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어. 못이 박혔어. 라하마저 그러지 말아줘."

"내가 안하더라도 당분간은 계속 들어야 할걸? 다들 걱정 많이 했으니까."

"그건, 기억하고 있으니까 알고 있어."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아든 모험가가 입술을 내민 채로 그라하 티아의 말에 답을 하다 검지로 찻잔의 손잡이를 문질렀다. 그리고 흘깃흘깃 자신의 반대편의 앉은 그라하 티아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라하."

"응?"

"미안해."

"다음부턴 조심한다고 하면 난 괜찮아."

"많이 놀라게 한 것 같아서. 나 원래 에오르제아에 오기 전에는 주술사 였었거든, 근데 초코보 마차 타고 오는 길에 다친 사람을 봐서 환술도 배워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했어. 그래서 울다하로 가던 길을 바꿔서 그리다니아에서 환술사 길드에 들어간거였거든. 주술은 이미 쓸 줄 아니까 나중에 배워도 괜찮겠지 생각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원래 주술을 쓴다는 이야기 들어보지 못해서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길을 바꾸는 경우도 많지."

"응. 하다보니 환술도 괜찮아서 그대로 정착했는데, 굳이 옛날에 뭘 썼는지 이야기 할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들어 말 안했더니 많이 신경쓰였어?"

"……쓰였어."


아니 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말이었찌만, 충분히 나올만한 말이었기에 모험가는 찻잔에 비친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렇겠지 라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아는 건 에오르제아에 도착한 이후의 너인데, 기억을 잃은 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너니까. 그런데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꾸 널 찾게 되어서 신경이 쓰였어."

"라하."

"나쁘지? 네가 무사한 걸 기뻐하지 못하고, 자꾸 내가 바라는 너만 찾았으니까. 정말 네가 무사하면 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전부다 좋게 마무리 되니까 욕심내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제 1세계도 구하고, 영웅의 목숨 또한 구했으며 자신도 원초세계로 돌아와 영웅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충분히 받을 만큼 받았고, 기억같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자기에게 좋은 것만 바라게 된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너의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여전히 내가 동경하는 영웅이었으면 좋겠고.


"가장 동경한다고 말해놓고선, 너를 존중하지 못하고 내가 바라는 걸 강요하다니. 이래선 실격이야."

"뭐, 어때.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


흔들리는 그라하 티아의 목소리를 붙잡아 세우는 기둥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모험가는 말했다.


"나는 '그라하가 동경하는 나'인 채로 있는 길이 맞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어. 그라하가 동경할 수 없는 내가 되는 길은 분명 잘못된 길일테니까, 막아서도 좋아."

"아니, 아니지. 너는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야하잖아."

"나는 지금까지 계속 내가 하고싶은대로 해왔어.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런데 라하는 그런 나를 좋아한다고 해줬고, 동경한다고 말해줬으니까. 분명 내가 좋아하는 길과 그라하가 나를 동경한다고 말해주는 길은 같은거라 생각해."

"만약 내가 잘못생각한거면 어떻게 하게? 네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내가 바라는 거니까 따르다가 아니라면? 나는 너의 악영향이 되고 싶진 않아."

"만약 그라하가 바라는데 내가 원하는게 아니면 이야기를 해봐야지. 왜 대화란 수단을 두고서 멋대로 무작정 따라할거라고 생각해?"


그라하 티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자. 네가 잠들고나서 깨어난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 그 기간만 해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내가 에오르제아에 오기 전까지 포함하면 정말 엄청 많을거야. 대신, 네 이야기도 해줘야해. 제 1세계의 이야기나 8재해 이후의 이야기."

"좋아. 나도 어디서부터 이야기하고, 얼마나 이야기를 할지 모를 정도로 길지만, 시간이 오래걸려도 전부 이야기해줄게."

"그래. 이젠 더이상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이 있으니까, 좀 써먹어봐."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 그저 막연히 옛 과거의 행적을 보며 좋아하고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며 곁에서 지켜보고 나아가는 살아있는 존재.


자신의 '동경'은 더이상 과거에서 멈춰있던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살아 숨쉬는 현재에 있는 존재였다. 그건 책 속 이야기와 달리 변할 수도 있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자신이 영향을 줄 수도 있었고,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삶을 체념하며 지내왔기에,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말았던 걸지도 몰랐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동경은 좋아함은 계속 변해갈 수 있다는 점을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억이 되돌아 온 이후에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라하 티아는 기억을 잃어버린 모험가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지금이라면 그때의 그에게 제대로 말할 수 있을텐데. 너 또한 좋아하고 있다고. 내가 존경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바로 너인게 맞다고.


"이야기하자, 오래오래.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위치가 바뀌고, 여러 일이 일어날 때에도 멈추지 않고."









"그치만 기왕이면 연인 맞아. 라고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응? 뭐가?"

"내가 물어봤을 때 말야. 우리 어떤 사이냐고."


식어버린 차를 마지 물 마시듯 다 마셔버린 모험가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을 반쯤 뜬 채 그라하 티아를 바라보았다.


"우리 연인이라고 말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반지도 없고, 연인이라 할 법한 물건도 없는데 다짜고짜 우리 만나는 사이라고 말하면 네가 못믿을거 같아서!"

"하긴 그래. 옛날엔 내가 누굴 만날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모험가는 자신의 손을 매만지면서 '반지인가...'라고 그라하 티아에게 작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모험가가 그라하 티아의 옆으로 다가가자 놀란 그가 붉은 눈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크게 뜨면서 눈을 깜빡였다.


"뭐, 뭔데?"

"라하 손 좀 줘봐."

"손?"


의문을 가지면서도 얌전히 왼손을 내민 그라하 티아를 보며 좋다고 웃는 모험가는 유심히 그라하 티아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손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만지고 나서야 만족했는지 양손을 허리에 두고 상체를 곧게 피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반지나 할까?"


그렇게 만들어진 반지는 결국 무기를 들 때 거슬린다는 이유로 둘 다 손에는 끼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그라하 티아가 목걸이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게 됐을 뿐, 이전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


단, 반지를 처음 만들고 낀 두 사람을 본 새벽의 혈맹 사람들이 암암리에 그런가보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며칠 돌의 집이 소란스러워 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