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널 판타지14 효월의 종언 네타가 있습니다.
효월의 종언 엔딩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빛의 전사의 호칭은 '모험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의 전사의 외견 묘사는 크게 하지 않지만, 여성캐릭터 설정입니다.
제 캐릭터를 생각하며 쓰기 때문에 세세한 설정묘사가 나와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음유시인이라는 설정입니다. - 여러모로 게임 내 설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 7월 디페에 중철본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소재의 애매함과 마감을 못 맞추어 포스타입에 올립니다.
- 모험가 사망소재 사용
(2022.06.13 포스타입에 업로드 했었던 글)
세찬 바람이 모험가의 동료들을, 새벽의 혈맹 일행을 덮쳤다.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바람에 휘말렸다.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니 날려보내졌다. 허공에 떠올라 거리가 가까워진 탓인지 커다란 절망이 한층 더 크게 보였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힘들고 터무니없는 상대더라도 함께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바람에 휘말려 떠올라 흔들리는 시야 끝에 아직 땅에 서 있는 모험가의 모습이 보였다. 거센 바람에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모험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포기하지 않았고,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결국 원하는 결말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번엔 그가 결말을 손에 쥐는 마지막까지 함께 있겠다 다짐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귓가에 이곳으로 떠나기 전에 들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누군가 한 명이 버튼을 누르면 다 같이 라그나로크 내로 전송이 될 거라는 그 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잠깐만……!”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차분한 표정의 그와 시선이 맞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너무나 담담한 모습에 바라보고 있는 쪽이 더 다급해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나 닿을 리 없었다.
“안 돼……!”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마지막까지 함께 있겠다고 다짐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모험가를 혼자 둘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모른 채 모험가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손에서 기계가 떨어졌다. 손에서 떨어진 순간 곧바로 바람에 휩쓸려 다른 동료들처럼 공중에 날아올랐다. 모험가의 의지에 따라 바람에 날려 보내졌다.
삐. 소리가 난다. 삐. 모험가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 움직이는 입 모양이 보인다. 삐~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알아채지도 못한 채 몸은 어느새 전송되어 있었다.
당황해하는 레포릿의 모습이 보였다. 이 기계가 사용되었단 건 그만큼의 위험과 마주했다는 소리였다. 서둘러 전송되어온 사람들이 무사한지를 확인하던 레포릿들은 이상한 듯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한 분은 어디 계신가요?"
울티마 툴레에 도착했을 때 산크레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지금은 함께 있는 걸 보아하니 무사히 합류한 모양이라며 안심한 레포릿이었다. 그러나 무사히 합류했고, 위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장치를 사용한 것이라면 한사람이 부족했다.
"그녀석이라면 그걸 쓰지 않았다. 혼자 남았을거야."
아무도 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에스티니앙이 레포릿의 질문에 답을 꺼냈다. 차분하지만 어딘가 응어리가 진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무력함을 깨닫고 이를 악무는 사람, 당장 다시 라그나로크를 뛰쳐나가 그를 도우러 가야한다는 사람.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기도하도록 하죠.”
고개를 숙여 라그나로크의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던 야슈톨라는 조용히 지팡이를 바닥에 놓은 채 말을 꺼냈다.
“분하지만 지금의 우리들로는 전력이 되지 못해요. 어쩌면 모험가에게 다다르기 전에 다른 공격에 당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이곳은 마음만이 현실이 되는 장소….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전력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기도하세. 그의 안전을, 그의 승리를. 그가 절망을 뛰어넘고 무사히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절망에 지지 않을거란 자신이 있었다.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몇몇 사람은 옛날 재앙을 앞에 두고 했던 기도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하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그대로를 전할 생각으로 간절히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 기도가 모험가에게 닿기를. 모험가의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레포릿이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맞잡은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라그나로크의 밖으로 나서자 밝은 빛이 시야에 가득했다.
마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듯,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듯 밝은 빛이 울티마 툴레를 감쌌다. 그 빛은 따뜻하고도 익숙하여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한명도 빠지지 않고 모험가의 승리를 확신했다. 모험가가 종말을 이겨내고, 새로운 내일이 찾아온 것이라며 우주에서 맞이하는 새벽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때까지는 웃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모험가도, 메테이온의 모습도 라그나로크에 나타나지 않기 전까진.
“알리제. 그러다 넘어지겠어.”
“지금 그게 중요해?! 그 사람이 돌아오질 않잖아!”
가장 먼저 라그나로크에서 뛰쳐나간 것은 알리제였다.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알피노가 걱정하며 뒤쫓았다. 라그나로크에 남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걱정했고, 두 사람의 호위를 겸 모험가를 찾기 위해 에스티니앙이 두 사람을 뒤따랐다.
“어쩌면 피해가 심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빨리 치료하러 가지 않으면.”
“그래. 그럴수도 있어. 나도 그 생각은 하는데 너도 다치면 안되니까.”
“알곤 있는데, 서둘러야 하잖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와도 알리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오로지 앞만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원래 알리제는 늘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편이었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남은 약간의 울음소리가 어째서 돌아보지 않는지 이유를 알리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알피노는 멈추라는 소리는 하지 않고 알리제를 따라 걸었다. 불안하고 울고 싶은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적은 몇 번 있었다. 모험가와 알피노는 꽤 오랜 시간동안 함께 행동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험가는 언제나 돌아왔다. 조금 너덜너덜한 모습일지라도, 시간이 오래 걸려도 돌아와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었다. 그의 승리를 확신하는데도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렇게 가슴을 가득 채운 적은 없었다.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밝고 따스한 빛이 비추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울티마 툴레가 어둡게 느껴졌다. 알피노와 알리제의 뒤에 있는 에스티니앙은 어두운 울티마 툴레를 두리번 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모험가와 함께 행동을 한 적은 많진 않았다. 언제나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돌아온 녀석이라는 것 쯤은 알곤 있었다. 거기에 모험가는 강했다. 에스티니앙도 그건 인정하고 있었다. 쉽게 쓰러지는 나약한 녀석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모험가가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에스티니앙의 머리엔 존재하지 않았다. 알리제 말처럼 부상을 입고 어딘가에서 쉬고 있겠지. 그러다 뒤늦게 우리를 보고서 여기까지 왔냐고, 걱정을 끼쳤다고 배시시 웃어보일 녀석이 자신의 파트너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나아가기 어려웠던 울티마 툴레의 길이 지금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돌이 발치에 걸려 불편하긴 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세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돌아다니는 잔상들도 세사람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너무 별일 없이 나아갔기에, 자신들이 전송된 마지막 장소에 다다르면 그곳엔 모험가가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치료해서 함께 돌아가면 될거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도착한 장소엔 아무도 없었다. 상상과 다르게 그곳엔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 마냥 조용한 공기만 내려 앉아있었다.
"찾아보자. 부상을 입었다면, 잘 안보이는 곳에 몸을 숨겼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래."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황량한 우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세명 다 알고있음에도 찾아보자는 말에 다같이 흩어져 사람의 그림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그림자는 커녕 혹시 전투중에 찢어졌을지도 모를 옷자락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엔 전투의 흔적조차 없었다. 이곳에서 싸운 게 아닌 것처럼.
상태를 확인한 에스티니앙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싸운게 아니냐는 의견을 냈다. 이곳은 너무 탁 트여서 거대한 종언이 공격하기 쉬운 곳이니 이동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모험가는 활을 사용하는 음유시인이었으니, 몸을 숨기면서 싸우는 것이 익숙할 수도 있었다. 몸을 숨겨줄 지형물이 방어막이 되어줄 수도 있었으니까. 전투에 경험이 많은 모험가라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그런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에스티니앙의 이야기는 납득이 갔다. 알피노와 알리제는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 나아갈 곳은 없었다. 이 앞은 그야말로 황량한 우주였다. 만약 이동해서 싸웠다면, 자신들이 지나온 곳 중 한 곳에서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전투의 흔적이라고 할법한 건 보지 못했다. 사람의 그림자 또한 보지 못했다.
스멀스멀 새까맣게 피어나는 생각들을 애써 무시하며, 못본 걸지도 모른다는 그럴듯한 말을 방패삼아 세명은 길을 되돌아갔다. 이번엔 구석구석 보지 않는 곳 없이 꼼꼼히 살펴보면서. 아까는 빨리 가는데에 급급해서 못 본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걷고 찾아 헤맨 끝에 세 사람은 라그나로크에 도착했다.
"거짓말이지."
알리제는 믿고싶은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거짓말이야, 이런 거.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없을리가 없잖아!"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라그나로크 안에 있던 레포릿과 남은 새벽의 동료들이 밖으로 나왔다. 분명 모험가를 찾기 위해 뛰쳐나간 세명이 그대로 돌아온 모습을 보고 당황한 감정이 순간 그들의 얼굴에 스쳤다.
"알리제."
"알피노, 다시 가자. 우리가 못 본거야. 그치? 그렇지? 그게 마지막일리 없잖아. 그 사람이 돌아오지 못할리 없잖아. 그냥, 이번엔 좀 힘든 상대라서. 그래서 어디에서 쉬고있는걸거야. 빨리 치료를 해서 데리고 와야지!"
"무슨 일이야."
산크레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알피노와 알리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에스티니앙만 한번 쳐다보고는 한템포 늦게 답을 되돌려주었다.
"찾으러 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전투 흔적도 없었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싸웠나 싶어 일단 갈 수 있는 곳은 샅샅이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아무 흔적도 없었다고?"
"그래. 나는 내가 사라지고 난 다음의 지역이 어떤 상태였는지 잘 모르지만, 저 둘이 확인했으니 틀림 없겠지."
"나, 나도 찾아볼게."
에스티니앙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그나로크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라하 티아가 밖으로 나왔다. 그라하 티아를 따라 라그나로크 밖으로 옮겨진 시선에는 어느새 알피노를 이끌고 저 멀리 걸어간 알리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에스티니앙은 말없이 알피노와 알리제의 뒤를 따라갔다. 이번에도 두 사람을 따라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마음만이 진실이 되는 장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불안함을 증폭시킬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마음에 불안함 피어오르고 있을 거란 걸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레포릿들도 안절부절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새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 찾을거란 말이나, 돌아올거란 말 또한 아무도 꺼내지 못했다.
다들 내심 알아채고 있었다. 모험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끝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알곤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모험가였고, 빛의 전사였으며, 영웅이었다. 너덜너덜한 상태라도 언제나 그들의 곁으로 돌아오는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도 알리제와 알피노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라그나로크 안엔 또다시 레포릿들만 남았다. 새벽은 정적이 감도는 울티마 툴레 전체에 퍼져서 사람을 찾아헤맸다. 간절히 원하면 단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마음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 마음은 보답받지 못했다. 아무것도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울티마 툴레에 인정 못한다는 알리제의 큰 목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해서야 그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모험가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임시 위령비가 올드 샬레이안에 세워졌다. 본래라면 그의 고향 또는 그가 주로 활동을 한 에오르제아에 세워졌어야 마땅했지만,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 임시적으로 올드 샬레이안에 세워졌다.
첫번째. 모험가의 고향을 아무도 알지 못했고, 에오르제아 어느 한 곳에 위령비를 세우기에는 그의 행적이 너무 광범위했다. 모든 나라가 모험가의 맹우를 자칭하였고, 그 영혼을 위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느 한 곳을 선택하기엔 정치적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현재는 보류 상태가 되었다.
두번째. 그가 새벽의 혈맹의 일행이기 때문이었다. 구세시맹과 열두기적 조사 위원회가 합하여 생긴 새벽의 혈맹이지만, 그 행보는 전선이 구세시맹의 루이수아의 뒤를 이은 것이기에 올드 샬레이안에 위령비가 있는 것도 마땅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올드 샬레이안이라면 에오르제아의 정치적 이유에 얽힐 일도 적었으니, 그 점으로도 좋았다.
무엇보다 새벽의 혈맹 소속 간부들의 의견을 모두 종합하여 나온 결론이 임시 위령비를 올드 샬레이안에 세우는 것이었다. 정식 위령비가 언제 어디에 세워질지 확실하지 않은 지금은 사실상 올드 샬레이안에 있는 위령비가 모험가의 정식 위령비였다.
그의 도움을 받아 도움을 되갚고자 힘을 썼던 이들이, 이번엔 모험가를 애도하기 위해 샬레이안을 찾았다. 항구를 가득 채울 정도로 찾아왔던 그 인파가 그대로 모험가의 위령비를 향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 모습을 그라하 티아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위령비도 없이 쓰러진 과거에 비하면 오히려 잘 된 일인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속이 쓰린건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하다. 자신은 영웅도 구해내었고, 제 1세계도 어둠이 돌아왔으며, 제 8재해는 일어나지 않았고, 종말에 지지 않고 미래는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영웅은 사라져버린 것인가.
'약속, 했었는데.'
절망에 몸을 내맡기기 전. 절망과 싸우기 위해 몸을 잃고서라도 길을 만들겠다 다짐했던 그 순간에 그라하 티아는 모험가와 약속을 했다. 어떤 약속이었더라. 분명 모험가와 관련된 약속이었던건 분명한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떠올리려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더 생각했다가는 모험가가 없다는 사실을 더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울티마 툴레를 몇 번이고 찾았다. 아이테리스에 돌아와서도 울티마 툴레와의 연결점은 사라지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라하 티아는 혼자서 혹은 알리제와 함께 울티마 툴레를 찾았다. 모험가의 흔적을 찾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늘 똑같은 결과가 그라하 티아를 맞이했다.
이정도되면 받아들이고 적응할 만도 한데, 한 사람을 바라보고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좀 더 기다리면, 좀 더 찾아보면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아니면 자신의 마음이 부족했던게 아닐까 하는 자책이 자꾸 고개를 들곤했다. 그곳은 마음만이 진실이 되는 곳이었으니까. 자신의 마음이 좀 더 강했다면, 모험가가 돌아온다는 마음이 강했었다면 어쩌면.
"또 여기야?"
"아, 시드."
생각에 잠겼을 때 갑자기 나타난 사람 그림자가 그를 불렀다. 시드라 불린 남자는 그라하 티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게 되는 것도 이해하지만, 슬슬 그만두는 편이 좋지 않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기에 보러 온 것 뿐이야."
"위령비를 손댈까봐?"
"......"
영웅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 또한 제법 있었다. 지금까지 위령비에 손을 대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아예 없을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인파 속에 숨어 들어온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이 손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런 걱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란 걸 그라하 티아 본인도 시드도 알고 있었다.
"그녀석도 생전엔 위령비에 자주 찾아갔었으니, 마음을 이해하긴 할테지만. 네가 자신의 위령비에 찾아오는 건 내켜하지 않을걸."
"그것도 알고있어. 정말 별의 바다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하겠지."
"자신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에 답답해하면서 말이야."
"정말로 별의 바다에 가라앉아 있다면……."
시드는 살짝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떤 의미로 한 행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의미는 아니란 걸 그라하 티아는 알 수 있었다. 별현미경으로 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음에도 시드는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드는 영웅의 위령비가 세워진 이후 놀라울 정도로 그의 죽음을 빨리 받아들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찾아올 거라는 걸 예상했다는 듯 영웅 없이 귀환한 라그나로크를 받아들였다.
그런 담담함이 그라하 티아는 부럽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사념에 잠겨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전에 시드는 영웅을 살리고자 했었으니 그만큼 받아들이기 더 힘든게 당연하다며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심지어 이미 한번 미래를 바꿔서 그를 살려냈으니 더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시드가 해주는 조언은 어디까지나 그라하 티아를 생각해서 하는 것이란 걸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진 못했다. 꼭 시드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이어도 마찬가지였지만.
위령비를 바라보고 있는 그라하 티아를 보며 시드는 적당히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라하 티아는 다시 위령비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은 묵념하며 그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다. 아직 시체조차 찾지 못한 영웅의 죽음을 확신하고 그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고싶지 않아 그라하 티아는 두눈을 꾹 감았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머나먼 우주로 떠났을 때 보았던 어둠보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어둠이 더 짙고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어둠은 자신의 남은 생애 내내 따라올 거란 확신이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절망이라고. 미래를 찾은 이제와서야 그라하 티아는 자신의 절망과 마주했다.
르베유르의 저택엔 언젠가부터 여러가지 도구들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모두 값비싼 물건들이었고, 여러 기능을 가진 도구들이었다. 예전같았으면 르베유르가의 주인인 푸르슈노 르베유르가 이런 물건들이 르베유르가에 들어오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지금 이 물건들이 들어올 수 있는건 그가 눈을 감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물건들의 주문자가 자신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알리제 르베유르는 울티마 툴레에서 쓸만할 것 같은 도구들은 가리지 않고 사모았다. 알피노 르베유르는 초반에는 물건을 사들이는 알리제를 말렸지만, 지금은 물건의 기능을 확인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영웅 없이 라그나로크가 귀환한 날 푸르슈노는 이런 미래를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돌아온 날부터 그를 두고 왔다는 말을 꺼내는 알리제를 보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푸르슈노는 모험가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아이들을 무사히 되돌려주었다. 아이들의 미래, 이 아이테리스의 미래를 구해주었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구해준 아이들과 아이테리스의 미래였다. 자신이 제대로 이 뒤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조차 했다.
아이들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느정도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건 모험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나온 선택이기도 하며, 아이들이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그로인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 부정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 모든 일이 끝나면 성숙한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알리제 뿐이었다.
"알피노 어때? 쓸만 할 것 같아?"
"그곳은 아이테리스하고 다르다보니 이것도 직접 가져가서 확인하지 않는 한 장담은 못하겠네. 그래도 사람을 찾는데 어느정도 도움은 될 것 같아."
"그래? 그럼 다음에 갈 땐 그것도 챙기고 가자."
"……그래."
알피노는 알리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아이테리스에 도착했을 때는 기운이 없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알리제의 모습을 보는게 괴롭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 알피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와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또한 갖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메리크경이 니드호그에 몸을 빼앗긴 에스티니앙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듯이, 현실을 볼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울티마 툴레에서 사라졌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죽음을 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자신들은 그의 의지를 받아 아이테리스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생각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않냐며 알피노는 속으로 웃었다. 올드 샬레이안엔 모험가의 임시 위령비가 세워졌지만, 두 사람은 한번도 그 위령비를 찾아가지 않았다. 올드 샬레이안에 임시 위령비를 세우는 것 자체에는 찬성했지만, 존재 자체를 인정하진 않았다. 인정해버리면 자신들이 그를 포기하고 떠나보내는 것 같아서.
"알리제."
"응?"
"다음엔 울티마 툴레에 언제 갈 생각이니? 그라하 티아에게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그렇네. 이정도 물건이면 슬슬 가도 괜찮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봐서 일정을 잡는게 좋겠어."
"산크레드와 위리앙제는 아직 이곳에 있는 모양이니 연락하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야슈톨라와 에스티니앙은 어떻게 할까."
"...일단 전원에게 다 물어보자. 새벽의 일이니까."
"그래."
그를 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인데 이걸 새벽의 일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알피노가 그라하 티아의 이름을 꺼낸건 그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모험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속으론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는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언제쯤이면 자신들도 그들처럼 겉으로나마 담담해질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감정마저 받아들인 날엔 그런 자신들을 지켜봐주신 부모님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알피노는 생각했다.
알리제는 알피노의 말을 듣고 모아놓은 물건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런것들이 정말로 울티마 툴레에 도움이 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아주 약간의 가능성조차 있다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간절한 마음은 진짜였고, 이 물건들이 자신의 마음과 울티마 툴레에 반응해 어떤 일을 해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 희망에 매달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는 걸 본 게 한 두번은 아니었다. 괴로운 결말이 남은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괴로운 일이 닥칠 때마다 언제나 모험가가 곁에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견디고 나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주먹이 쥐였다.
그라하 티아는, 8재해 이후의 사람들은 시간과 차원을 넘어 모험가를 살릴 방법을 찾았다. 자신이라고 찾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분명 울티마 툴레에 있으니 그들보다 더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찾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정말로 그가 울티마 툴레에 없을 때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막막한 마음이 알리제의 가슴에 가득했다. 그 마음은 족쇄가 되어 알리제를 울티마 툴레에 묶어두고 있었다.
"꽃이라도 들고 갈거냐?"
"그 분이라면 분명 꽃보다는 좀 더 다른... 먹을 것 같은 걸 좋아하실 것 같군요."
"아, 확실히. 위령비에 꽃들만 잔뜩 있는 걸 보고 내심 불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석은 먹지 못하겠지만, 라스트 스탠드에서 뭐라도 사고 갈까."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됩니다."
라비린토스에서 올드 샬레이안으로 올라온 위리앙제와 산크레드는 그런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라그나로크가 아이테리스로 돌아온 이후 많은 레포릿들이 아직 올드 샬레이안에 남아있었다. 그 중 반정도는 아직 라비린토스에서 많은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라비린토스 안을 구경하고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런 레포릿들에게 안내와 설명을 하고 동시에 원하는 목적지까지 호위를 해주며 지내고 있었다.
이미 한번쯤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둘 또한 모험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험가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단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산크레드는 임시라곤 해도 위령비를 에오르제아에 만드는게 괜찮을 것 같다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보다 떠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할 줄 아는 그였기에, 모험가는 아직도 에오르제아를 모험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여 낸 의견이었다. 그리고 오랜 상의 끝에 올드 샬레이안에 임시 위령비를 두는 것에 찬성했다. 에오르제아를 즐기게 하고 싶었을 뿐, 정치적 문제에 얽히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위리앙제는 야슈톨라와 함께 에오르제아의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험가가 새벽의 사람이라는 점 등 이유를 대어 임시 위령비를 올드 샬레이안에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무엇보다 그 위령비는 임시 였다. 만약 그의 마음과 의지를 존중하고자 에오르제아에 두고자 하면, 임시가 아닌 정식 위령비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말을 꺼냈다. 야슈톨라는 모험가이니 이곳저곳에 이동하는 걸 오히려 더 마음에 들어할 수도 있겠네요. 라고 말을 꺼내 의견을 정리했다.
라스트 스탠드에 들러 위령비 근처에서 먹을 거라며 간단한 차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라스트 스탠드의 직원은 익숙한 듯이 알겠다며 주문을 받았다. 생각 자체는 무척이나 좋은 생각이었지만, 오랜시간 라비린토스에서 레포릿들과 함께 한 두 사람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임시 위령비 근처에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취식이 금지된 건 아니었기 때문인지, 라스트 스탠드에서 먹을 것을 사 위령비 근처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위령비 앞에는 꽤나 많은 꽃들이 놓여있었고, 그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보였다. 모험가 답게 발은 꽤나 넓었나보다며 산크레드가 말을 꺼냈다.
임시 위령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 사가지고 온 차와 샌드위치를 펼쳤다. 차례차례 찾아와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잘 보이는 장소였기에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엑스아다만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로 발이 넓은 녀석이었어. 새벽의 연락망 대부분도 사실은 그녀석 때문에 연결되었다 말해도 과언은 아니니까."
"그만큼 신출귀몰하시고 바빠보이셨지만, 늘 사람을 생각하실 줄 아셨죠. 제 1세계에서도 원초세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에 안심하며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말이야."
위리앙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설마 마지막이 그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홀로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머나먼 길을 떠나셨지요"
그렇게 홀로 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등을 떠밀고 힘이 되어 먼 길을 떠날 각오를 했던건 산크레드 쪽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살아있는지 한탄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무사히 되돌려준 모험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고, 그 마음과 노력을 헛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산크레드는 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떠난 것이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웃었고 말이지."
"산크레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떠오른 생각이 그만 입 밖으로 흘러나와 산크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전송 장치를 손에서 놓던 모험가는 웃고 있었다. 만족한 듯이,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듯 웃고 있었다. 수많은 전투를 혼자서 보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가 돌아오길 바란 것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강하진 않았던걸까, 그곳은 마음만이 진실이 되는 장소였으니까.
"모험가는 내키지 않아하셨을 풍경이군요."
"응?"
"사람이 많은 장소를 불편해 하셨으니까요."
"아, 아~ 그랬지. 예전엔 그정도로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를 불편해 했지. 그나마 제 1세계에선 괜찮아 하는 것 같았지만, 갈레말드를 향할 때도 좋아하면서 조금 불편해 했었지. 아니, 불안해 했다고 해야하나."
"울다하에서 있었던 이슈가르드 승전 축하연이 생각이 나서 불편하시다고, 무언가의 악의가 다시 소용돌이 쳐서 사건이 일어날까 생각이 드신다 말을 꺼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울다하인가."
산크레드도 위리앙제도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새벽의 혈맹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잊지 못할 일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야."
"늘 생각을 알리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러면서 어떨 땐 정말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거나, 장난이나 치고."
그렇게 두 사람은 모험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한 시간은 꽤 길었고, 많은 사건 사고를 함께 겪고 이겨내왔다. 목숨을 맡기기도 했고, 맡겨진 적도 있었다.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모험가의 생각을 예상하고 맞춘적도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문득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생각하는 것 보다 모험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만, 누구보다 새벽의 사람들을 신경쓰고 바라보았다. 모든 일에 대범하게 맞서 싸우는 줄 알았지만, 의외로 세세한 일을 기억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모험가 개인적인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싫다면서도 축제를 좋아해 불꽃축제, 별빛축제 등 축제가 있으면 달려가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번도 함께 한 적은 없었다. 같이 식사를 하긴 했지만, 새벽의 사람들이 사온 음료와 음식을 같이 먹을 뿐 자신의 기호를 말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음식이든 잘 먹기도 했고, 불평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그런 배려가 감사하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이제와서 이것이 후회가 될 줄은 몰랐다.
좀 더 물어봤으면 좋았을텐데. 좀 더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았을텐데. 이런 후회는 문브뤼다를 떠나보내고, 지금까지 시간을 보내며 후회하지 않는 법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부족한 점이 계속 떠올라 후회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많은 시간과 많은 말들을 쌓아올리지 않았을까. 눈 앞에 음식들이 놓여있음에도 위리앙제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울티마 툴레로 떠나기 전 넷이서 식사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웃으며 미래의 이야기를 하던 그 때 모험가는 웃으며 뭐라 말을 했었는지.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었건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부족한 건 없었어. 후회란건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생기는 법이니까."
"좀 더 함께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어야 했던 것일까요."
"언제나 있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함께 하는 시간이야 언제든 더 늘릴 수 있을거라고……."
손에 찻잔을 들고서 말을 꺼내던 산크레드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작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게 부족했던걸까.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간절함이 없었던걸까."
위리앙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산크레드도 이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때를 생각하고 있는지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마음만이 진실이 되는 장소. 모험가를 좀 더 알고 있었으면,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돌아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이 없었다면. 무언가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두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을 바꿔주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미 두 사람의 곁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되돌아왔을테니까.
산크레드가 찻잔을 들고 위리앙제에게 가볍게 내밀었다가 당겼다. 그 모습이 마치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과 같아 위리앙제는 '이건 술이 아닙니다.' 라며 가볍게 말을 꺼냈고, '알고 있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리앙제는 산크레드를 따라 찻잔을 들었다. 야슈톨라도 부르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곳에 있을테니까. 부르면 분명 함께해주었겠지.
얕은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동료들을 전부 휩쓸고 간 바람과 비교해서 한없이 약하고 가벼운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그 가벼운 바람에 몸이 떠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 마냥, 눈을 뜨면 세찬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을 것 같이.
라그나로크에서 천천히 누군가가 내려왔다. 이곳의 차분한 분위기는 진정이 되면서도 누군가의 묘지가 되기에도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둘러보고 있자 레포릿이 종종 걸음으로 울티마 툴레에 도착한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테리스로 돌아가고 싶을 땐 언제든 말해주세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친절한 레포릿의 말에 익숙한 인사를 건네는 야슈톨라. 이야기를 끝마친 레포릿이 종종걸음으로 라그나로크로 올라가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울티마 툴레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빛이 비치는데도 약간 어둑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이곳에 밝은 해가 비치는 내일따윈 다가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야슈톨라의 목적은 모험가가 맞았으나, 알피노나 알리제처럼 그를 찾기 위해 울티마 툴레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미 자신의 눈으로 울티마 툴레의 모든 곳을 살펴보았다. 모험가가 없다는 건 너무 명백했고, 눈 앞에 내밀어진 사실을 부정할 정도로 야슈톨라는 어리석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풀이 바싹 마른 초원을 거든 것 마냥 바삭바삭 소리가 들렸다. 실제 바닥은 평범한 돌바닥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걸음을 내딛는 감각마저 풀이 마른 초원을 걷는 기분이었다.
모험가가 이겼기 때문인건지, 울티마 툴레에 남은 잔상들은 찾아오는 자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 모양인지 시선은 느껴졌다. 그러나 바라만 보고 다가오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래를 쟁취한 자와 종말을 맞이한 자 사이에 있는 간극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야슈톨라는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자신과 다른 존재를 경계하도록 본능은 작동한다. 잔상일지라도 그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겠지. 자신의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야슈톨라는 시선 따위야 상관없었다.
야슈톨라 치고는 드물게 약간 묵직해보이는 짐가방을 들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짐가방이라 보이는 것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진 않는 물건이었다.
야슈톨라는 모험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그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울티마 툴레에 발을 내딛는건 제대로 된 무덤에 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위령비는 어차피 살아있는 사람들의 위로가 되기 위해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떠난자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울티마 툴레는 모험가가 떠난 장소임에는 확실했고,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아직 모험가의 에테르가 떠다니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즉 울티마 툴레 자체를 모험가의 무덤이라고 야슈톨라는 생각했다.
모험가를 마지막으로 본 장소에 도착하고 야슈톨라는 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안에는 여러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멋진 장식과 화려한 색으로 된 활도 있었고, 책도 몇권 있었으며, 타타루가 만든 의상도 있었고, 요리사 도구와 인형도 몇 개 있었다.
"어때요. 전부 당신이 좋아할 거 아닌가요? 좋아하는 물건도 없이 이런 곳에 혼자 있기는 심심할테니까 가지고 왔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는지 야슈톨라는 웃었다.
"그렇지만 기회가 된다면 유령의 모습으로라도 알피노와 알리제의 앞에 나타나 주겠어요? 알피노는 놀라겠지만, 그렇게라도 본다면 분명 기뻐할테니까요."
야슈톨라는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들의 설명을 했다. 타타루가 직접 만든 옷부터 시작해, 언제 스쳐지나가듯 모험가가 읽어보고 싶다고 했던 소설책과 갖고 싶다는 멋진 활 등등. 한번쯤 모험가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온 물건들이었다.
"살아있을 때 줄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멋대로 떠나버린건 당신이니까 이정도로 참아요."
잔잔한 바람이 스쳐지나가 바닥에 작은 먼지가 가볍게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언제 별의 바다로 돌아갈진 모르겠지만, 돌아갔을 때 에메트셀크의 잔소리가 심하겠군요. 분명 보고오라고 했을텐데. 대신이 될 순 없겠지만, 그곳들은 제가 보고 가겠어요. 저도 흥미가 있는 이야기였거든요."
야슈톨라의 목소리만 잔잔하게 퍼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은 야슈톨라도 당연히 알고있었다. 그러나 신난 목소리로 가끔은 정신없다고 느껴진 밝은 목소리로 돌아오는 답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쓸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 한명 같이 오는 것이 좋았을까요."
울티마 툴레에 깔린 슬픔은 생각보다 짙어서 마녀 마토야라 불렸던 자마저 휩쓸릴 것만 같았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차가운 공기를 마신 듯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괜찮다는 야슈톨라의 마음마저 상처입힐 정도로 날카롭게.
이번 종말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은 갈레말드와 사베네어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터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고, 터전이 짓밟혔다. 종말을 이겨내고 미래가 돌아온 지금도 그 상처는 다 아물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사베네어의 사람들은 미래가 찾아온 것에 기뻐하며 삶을 누릴 각오를 다졌다.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서로도왔다. 얻게된 미래는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막막한 것으로 다가왔을텐데도 힘차게 살고자 했다.
그런 생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창을 등에 맨 남자는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찾은 이슈가르드도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마냥 좌절과 슬픔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해결하며 미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어쩐지 둘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술잔을 들고 한모금 마신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겉모습만 소년이지 안에 있는 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용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브리트라, 너도 마실거냐?"
"이 몸은 미성년자라서요."
바르샨은 누가봐도 어린 소년이었고, 술을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나이는 되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든 사람은 용이란걸 알고 있기에 에스티니앙은 가볍게 말을 건네보았다. 용이 술을 마시는지는 그도 알 수는 없었지만.
모험가 없이 울티마 툴레에 돌아오고, 모험가의 임시 위령비가 올드 샬레이안에 세워지는 것까지 보고는 에스티니앙은 그곳을 떠났다. 더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피노는 모험가를 찾겠다며 발을 멈췄고, 창을 휘두르던 다른 이유는 울티마 툴레에서 사라져버렸다. 새벽의 혈맹 또한 현재로선 무슨 일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그의 역할은 끝난것이었다.
브리트라가 부탁할 것이 있다며 라자한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또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지낼터였다. 마치 모험가처럼. 술잔을 들고 피식 웃던 에스티니앙은 한모금 마신 후 테이블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왜 부른건데?"
"아직은 더 쉬고 계세요. 라자한은 아직도 혼란스러우니 진정이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나 더 쉬어야하는거야."
"음식은 입에 안맞으시나요?"
"……맛있다."
"그건 다행이네요."
에스티니앙은 소년을 보고 브리트라라고 불렀지만, 소년은 브리트라가 아니라 바르샨처럼 행동했다. 바르샨이 태수인 브리트라의 인형이라는 걸 모르는 라자한의 주미는 없었다. 그럼에도 다들 바르샨을 바르샨으로 대하기 때문인지, 브리트라라고 불려도 이 몸을 움직일 때는 존대를 사용했다. 에스티니앙은 그게 약간 불편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곳에 있는 내내 듣다보니 점점 적응해갔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같이 지내면서 익숙해지고, 같이 있던 사람이 사라져도 빈자리를 느끼면서도 점차 그 빈자리에 익숙해지다 못해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용기사단에 있으면서 많은 전투를 치뤘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금방 떠나간 사람들의 빈자리에 익숙해지곤 했었다.
누구든지 전투에서 살아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건 자기 자신도 포함되는 이야기라고 에스티니앙은 알고 있었다. 근데 그 안에 파트너는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원하시면 올드 샬레이안에 계셔도 됩니다. 때가 되면 부르러 가도 되니까요."
"간다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있는게 아닌 위령비 같은거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
파트너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울티마 툴레 전체가 모험가의 무덤이 되었으며, 편하게 애도하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했던 것처럼 애도하기 위해 꽃을 들고 울티마 툴레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직은 빈자리를 빈자리인채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있는 탓일까. 아직은 파트너의 죽음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며 에스티니앙은 속으로 웃었다.
라자한의 상태가 안정되어 브리트라가 자신에게 의뢰의 내용을 말할 때까지, 자신의 적응은 끝날 수 있을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알피노나 그 쌍둥이 동생처럼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니었고, 찾아 헤매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묘하게 그런 느낌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색에 잠겨있으면 어느샌가 다가와서 앞자리의 의자를 빼내어 앉고는 '무슨 생각 하고 있어?' 하고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험가는 에스티니앙을 보고 신출귀몰하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험가 본인에게 말을 해야 적합할 단어였다. 그 탓인지 아무렇지 않게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이 브리트라. 이번 종말로 떠난 사베네어의 사람들이 보고싶다는 생각은 해본적 없냐?"
"있어요. 늘 생각합니다. 어떻게 지켜줄 수 없었을까 생각하는 일도 많고, 사실 살아있다고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해본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건 덧없는 바람이란 것도 알아요. 상흔은 덧나지 않게 약을 쓰면서 치유되게 두는 수 밖에 없으니까요. 오히려 건드려서 덧나지 않게 하는게 중요합니다."
"왜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건데."
"글쎄요. 왜일까요."
에스티니앙은 접시에 놓여있는 꼬치를 하나 손에 쥐고는 가볍게 까딱까딱 움직였다.
"나는 그녀석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대로 있었으면 다같이 죽었겠지. 정확한 판단이었어."
"그런가요."
"너에겐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난 니드호그에게 몸을 빼앗겼을 때……, 니드호그와 같이 죽을 각오를 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기꺼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목적을 위해서는. 아마 그때의 내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한 거겠지, 파트너는. 그러니 그녀석은 잘한거다, 잘한건데……."
"……하지만 죽음에 나쁘고 잘하고는 없다고 생각해요."
바르샨과 에스티니앙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스티니앙은 말없이 손에 든 꼬치를 입에 가져갔다. 라자한의 음식은 입에 맞았다. 다같이 라자한에서 식사를 할 때, 음식이 입에 맞는지 잘 먹던 모험가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 이 꼬치도 맛있다고 잘 먹었겠지.
에스티니앙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설마 또다시 누군가를 잃은 감각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떠나는 쪽이 아니라 남겨지는 쪽이었다. 작은 한숨소리가 바로 앞에 앉은 바르샨에게까지 닿지 못하게 아주 작게 새어나오고 사라졌다.
그렇게 세계엔 평화가 찾아오고, 영웅은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 올드 샬레이안에 등장했다. 그 책을 쓴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영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할거라고 다들 말했다. 영웅이 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감췄다고 끝냈으니까.
한 소녀가 올드 샬레이안의 위령비 앞에 앉아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위령비 주변은 한산하여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소녀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예전엔 이곳에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가끔가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묵념을 하고 갈 뿐이었다.
아이테리스엔 미래가 이어졌고, 새벽의 혈맹은 해산했다. 각자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찾아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모험가가 목숨 걸고 지켜준 미래라면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은 이 평화로운 미래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영웅의 죽음은 점점 잊혀져갔다. 기억하는 이들 또한 더이상 슬퍼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전엔 이런 일이 있었지, 이야기를 꺼내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소녀가 책을 덮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엘레젠에 미코테, 휴런도 보였다. 놀란 소녀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긴 은발을 푸른색 끈으로 얇게 묶은 한 엘레젠 남성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널 방해할 생각은 없어."
"위령비를 찾아오신거 아닌가요?"
소녀가 말을 하자 말을 꺼낸 엘레젠 남성과 똑같이 생긴 엘레젠 여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맞는데, 뭔가 하려고 온 게 아니라서 괜찮아. 책 읽고 있었지? 계속 읽어, 방해해서 미안해."
"요새는 아이들이 숨는 장소로 쓰는 모양이네."
"예, 그런 모양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이 줄었으니까요."
차례로 휴런 남성과 얼굴에 무슨 문양이 있는 엘레젠 남성이 말을 꺼냈다. 소녀는 저게 현자의 문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 올드 샬레이안에는 저런 문양을 가진 굉장한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소녀가 책을 끌어안고 밖으로 비켜나가자 붉은 머리의 미코테가 쓴 웃음을 짓더니 주머니를 뒤져 작은 사탕을 꺼냈다.
"미안해."
"아니에요."
미코테의 말에 답하면서 소녀는 사탕을 받았다. 책을 끌어안은 채 두손으로 사탕을 보물처럼 받아든 소녀는 방긋 웃어보였다.
"울티마 툴레에 갈거라며, 여기에 얼마나 있을건데."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아요. 일단 이곳도 정식 위령비니까요. 인사를 하고 가는 게 마땅하지 않겠어요?"
창을 등에 맨 엘레젠 남성과 미코테 여성이 말을 했다. 위령비를 찾아온 게 맞은거 같은데 그들의 표정이 밝아 보여 소녀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 위령비는 슬픈 표정으로 찾아오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저 사람들은 어째서 즐거워 보이는 걸까.
그들은 위령비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방해해서 미안했다는 말을 다시 꺼내고는 위령비를 떠나갔다.
오늘은 영웅과 동료들이 종말을 멈추고, 아이테리스의 미래를 지킨 날이었다. 영웅은 모습을 감추고, 동료들이 라그나로크라는 배를 타고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온 날. 즉 영웅의 기일이었다.
모험가의 기일을 맞아 옛새벽의 사람들이 모였다. 어째서인지 시간이 흘러도 라비린토스와 울티마 툴레의 연결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연결점이 사라질 때까지 매년 모험가의 기일엔 올드 샬레이안에 모이기로 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한사람도 빠진 적 없이 다 제 날짜에 올드 샬레이안에 모였다. 연락이 잘 닿지 않은 에스티니앙마저.
울티마 툴레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저 낯선 시선으로 새벽의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들은 새벽에게 이야기를 걸어왔고, 조언을 구했다. 사라진 별의 잔상에 불과했지만, 잔상일지라도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실은 누구든 희망을 갖고 미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울티마 툴레엔 빛이 비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방문 했을 때의 어두웠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두운 곳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빛과 어둠은 항상 같이 있으며 희망과 절망 또한 그렇다는 걸 그들은 이제 알고있었다.
"뭐부터 이야기할까."
"이야기 할 게 너무 많네요. 알피노의 키가 또 저번보다 훨씬 컸다는 이야기부터 꺼낼까요?"
그들의 목소리에 슬픔은 없었다. 아직도 보고싶지 않냐고 질문이 오면 당연히 보고싶다는 답을 할테지만, 그게 슬프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당당했다. 당신이 지킨 미래를 자신들이 이렇게 소중히 나아가고 있다고 가슴피고 말을 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상처를 썩게하는 독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약이 되기도 한다. 옛새벽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은 약이 되어주었다. 절망만이 가득한 이 울티마 툴레 가득히 빛을 비추고 간 자신들의 빛의 전사에게 당당할 수 있는 약이 되어주었다.
이제 그의 영혼은 이곳엔 없겠지만, 그의 마음은 이곳에 남아있음에 분명했다. 그야 울티마 툴레에 아직까지 빛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마음만이 진실이 되는 장소. 그렇다면, 눈 앞에 보이는 진실은 분명 누군가의 마음임에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