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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기회와 후회의 발렌티온 데이



  • 파이널판타지 14 드림 글입니다.
  • 캐릭터는 아이메리크, 주인공은 여성 아우라 렌 빛의 전사입니다.
  • 파판14 창천의 이슈가르드 네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점은 칠흑입니다.
  • 드림이 불편하신 분은 이 창을 닫으시거나, 뒤로 가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2022.02.11 포스타입에 업로드 했던 글)



모험가는 스스로에게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다. 타인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냐고 물으면, 있다고 답은 하겠지만 스스로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모래의 집이 습격 받았을 때도, 새벽의 동료였던 자들의 시체를 옮겼을 때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자신에게 마음이란 것이 있는 것인가. 애당초 마음이란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야만신을 사냥하고, 위험한 전투에 앞장서서 싸우는 영웅의 입장에선 필요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영웅이 아닌 모험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갖고 있을 필요성을 느꼈다.


모험가를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마음이라는 것은 의외인 곳에서 천천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본인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한 사람을 향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었다. 마음을 알아채기에 애정이라는 감정 만큼 강한 것은 없다는 걸 온갖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도저히 답이 돌아올리 없는 사람에게 애정을 보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모험가는 추운 곳이 싫었다. 차가운 눈발과 함께 살을 에는 것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커르다스 중앙고지에 향한 것은 맹우의 따스함이 좋았기 때문이고, 그 웃음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그 웃음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의뢰나 다른 필요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발을 옮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짐했었다.


잊힌 기사 주점에 자리잡고 앉아 차갑게 식어버린 음료를 천천히 홀짝이고 있었다. 처음 나올 때는 분명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의 추위를 이기지 못한 듯 빠르게 식어갔다. 지브리옹이 모처럼이니 새로 가져다주냐고 물어봤지만, 모험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생각에 잠겨 검지 손가락 끝으로 컵을 톡톡 건드렸다. 작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시끄러울만도 했는데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험가가 영웅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참 창천거리 부흥으로 바쁠 시기라 주점에 사람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웬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어."

"더 시켜요?"

"아니, 그런 소리는 아니었는데."


모험가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갈색머리의 엘레젠 남성은 약간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었다. 잊힌 기사 주점의 주인인 지브리옹이었다. 모험가는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 컵 속 음료를 바라보고는 오래 앉아있는 것치고는 너무 적게 시켰나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있을 거면 여관방에라도 들어가 쉬는게 어때?"

"빈 방은 있고요?"

"지금은 있지."


창천거리 부흥이 시작되면서, 이슈가르드를 찾아오는 모험가들도 많아졌다. 한 두사람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이슈가르드에서도 그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 동시에 성황을 이루고 있는 건 잊힌 기사 주점의 여관방이었다. 언제나 늘 찾아가면 방이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시간대를 잘 못 맞추면 부흥하러 온 모험가들로 방이 가득 차서 방을 받을 수 없는 일도 많았다. 그게 설령 천년전쟁을 끝낸 영웅이라고 해도.


포르탕가에 찾아가면 방 하나 정도야 기꺼이 내주겠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곳을 다시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미래로 향해가고 있다고 하는데, 모험가는 아직도 과거의 한부분에 발목이 붙잡혀있는 느낌이었다.


"아니에요. 들어갔다간 괜히 잠만 잘 것 같고."

"좀 쉬면 어때. 한참 바쁘신 영웅님인데."

"지브리옹 마저 그러지 말아요……."

"그래, 모험가. 이젠 좀 새벽의 일은 여유가 있나보지?"

"어떻게든요. 다시 이곳에 와서 멍때리고 있을 시간은 생겼네요."


언제부터였을까. 모험가는 어느 날부터 시간이 많이 남는 날에는 잊힌 기사 주점에 와서 앉아있곤 했다. 쉴 집은 없는지, 쉴 곳은 없는지 지브리옹이 몇번 물어보 적이 있었다. 영웅에게도 특권같은 건 없는 모험가 거주구 시스템 덕분에 집은 없다는 말을 듣고 지브리옹이 헛웃음 흘리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에서 이런 곳에 죽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앉아있는 장소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보고 지브리옹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한두번이면 모를 수 있지만, 이렇게까지 몇번이고 보는 모습이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시선 끝이 사실 주점 바로 옆에 있는 신전기사단 본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르탕가를 시작으로, 아유나르트가와도 친분이 있는 모험가는 이슈가르드에 친분이 있는 것치고는 이슈가르드를 불편해 했다. 그건 지브리옹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모험가가 마음을 가진 것이 그 사람이라니 세상은 정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어갔다. 모험가 본인에게는 그저 괴로운 일일지도 몰랐지만. 그걸 어느정도 이해하기에 지브리옹은 웬만하면 모험가가 자주 앉는 자리는 비워둘 수 있게 노력했고, 여관방도 하나쯤은 남겨두려고 노력했다. 너무 사람이 몰려드는 날엔 별 수 없었지만.


"오늘도 그 분은 늦으시는 것 같군."

"뭐, 일중독자니까요."


담담하게 하지만 약간은 섭섭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섭섭함? 자신은 그 사람에게 섭섭해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은 신전기사단 총장이었고, 지금은 의원직도 겸임하고 있다. 바쁜 사람이다. 알고있다. 그 사람이 일 때문에 늦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섭섭해 할 자격은 자신에게 없었다. 자신은 그 사람과 아무 관련이 없었으니까.


자신은 모험가이고, 그저 우연히 용시전쟁을 끝내는데 도움을 주어 이슈가르드에서 영웅이라고 불릴 뿐인 사람이었다. 그 뿐이었다. 이슈가르드를 생각하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것도 알고 있고, 그걸 은혜라고 여겨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건 자신이 이슈가르드를 위해 행동을 했기 때문에 되갚아 주는 것 뿐,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그정도 구분을 할 눈치는 있었다. 여기서 섭섭해 하는 건 그것에 반하는 눈치없는 행동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처음에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괜히 붙잡히지만 않았어도 맹우는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포르탕 백작이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 사람을 원망할 자격도 이유도 없어졌다. 그 다음엔 맹우를 떠나게 만든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 마음 또한 곧 지워야만 했다. 맹우가 그러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토르당도 쓰러트리고, 대부분의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선이 그 사람을 쫓아가고 있었다.


"이만 일어나볼게요."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는데?"

"의뢰라도 찾아보거나, 마물 수배서 좀 가지고 가죠 뭐."

"그래, 이거라도 가져갈래?"


언제 준비했는지 지브리옹이 보자기에 싸놓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마 먹을 것을 싸준 것 같았다. 고민하던 모험가는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지금 대금을 주려고 하면 안받을 것 같으니, 나중에 잊지말고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을 내뱉자 흰 입김이 퍼졌다. 추웠다. 계단을 올라 건물 밖으로 나오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슈가르드에서 눈은 일상이었지만, 내리는 걸 보고 있자니 더 추워지는 것 같았다. 그냥 호의를 받아서 여관방에서 쉬기나 할걸 그랬나. 약간 후회가 몰려왔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의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는.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에는 약간의 쇠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갑옷의 소리였다. 한 둘이 아니었지만, 저 건물에서 저렇게 기사들이 우르르 나오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옮기던 발걸음을 멈추고 모험가는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디자인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 사이에 눈에 띄는 파란색 갑옷이 눈에 띄었다. 그 옷을 입은 검은 머리의 엘레젠 남성은 망설임 없이 앞을 바라보고 나오다가 뒤를 돌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명령을 내리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옆에는 여성 엘레젠인 루키아도 서 있었다. 이내 일사불란하게 기사들이 움직이고, 그는 루키아에게 무언가 말을 한 후 몸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든 순간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지만, 등 뒤에 들리는 목소리가 모험가를 붙잡았다.


"영웅 공."


루키아의 목소리였다. 불려졌는데 돌아보지 않고 갈 순 없었다. 한번 숨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마치 보지못했을 뿐인 것처럼 몸을 돌리고 모험가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루키아씨, 아이메리크 총장님."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군."

"부흥 때문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래, 보고를 통해 이야기는 듣고있네. 자네에게는 늘 감사할 뿐이야."

"부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길. "

"감사합니다. 루키아씨. 바쁘신데 붙잡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히려 붙잡은 것은 우리 쪽이지. 오랜만에 자네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게 정말일까. 정말 반갑긴 한걸까. 순간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모험가는 웃었다. 나는 보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반가운 것은 자신인데, 정말 자신과 같이 반갑긴 한걸까. 늪 같은 마음이 자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모험가는 서둘러 몸을 돌러 자리를 벗어났다. 가능하면 떠나는 뒷모습까지 바라보고 싶었지만, 이 마음에 삼켜지는 것 보단 차라리 보지 않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숨이 차가웠다.  이슈가르드의 추위는 아무리 찾아와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음 한켠이 서늘한 것도 분명 이 추위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활을 잡고 있는 동안엔 잡생각이 들지 않을테니, 어서 밖으로 나가 뭐라도 사냥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뒤돌아 걸음을 서두르는 모험가를 바라보다 루키아는 아이메리크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신겁니까?"

"뭘, 바쁜 사람을 붙잡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나. 기회야, 다음에도 있을테지."


모험가, 새벽의 영웅, 해방자. 이제는 다른 세계에까지 넘어가서 활동하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웅.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수식어가 모험가에게 붙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험가를 기다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나중에 찾아오기나 할까. 자신의 입으로 꺼냈으면서도, 아이메리크는 스스로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떠나는 모험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면 자신은 늘 모험가의 뒷모습을 바라본 듯 했다. 합동전투때도, 사룡이 나타났을 때도. 늘 앞에서 싸우는 모험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자신이 바라볼 건 모험가의 뒷모습 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씁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슈가르드가 안정이 되면. 그때엔 모험가와 함께 떠나볼 수도 있을까. 과연 자신의 생이 다 하기 전에 이슈가르드가 안정이 되기는 할까. 이전에 모험가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흘리듯 모험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총장님은 이슈가르드가 우선이니까요.'


감정 하나로 이슈가르드를 두고 갈 순 없었다. 그렇지만, 그 감정 하나도 놓치고 싶진 않았다. 그게 영웅이라 불리는 자라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모험가는 늘 날개를 단 듯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날아가고는 했다. 이젠 또 어디를 향해 날아갈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 사실이 종종 가슴을 턱턱 막히게 했다.


"가지, 루키아."

"예."


그래도 모험가는 이슈가르드를 찾아온다. 아이메리크도 알고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모험가는 이슈가르드를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이곳은 모험가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기 쉬운 장소였으니, 이해했다. 그럼에도 모험가는 이슈가르드를 찾아와줬다. 부흥을 위해, 이제 막 전쟁을 끝낸 사람들을 위해. 그 상냥한 마음이 모험가를 이곳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는 거라면,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슈가르드에 모험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설령 얼굴을 마주보며 자리할 수 없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에, 같은 나라 이슈가르드 안에라도 있을 수 있도록. 그래야 그나마 자신이 원하는 기회가 이런식으로 우연을 가장하여 찾아오게 될 수 있을테니까.


눈이 내리는 이슈가르드를 걸어갔다. 익숙한 추위가 오늘은 한층 더 매섭게 다가오는 듯 했다. 이슈가르드 내에 몸을 녹일 수 있는 장소를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듯 보이는 누군가를 위해.


눈을 밟은 소리를 몇차례 듣고 나서 모험가는 뒤돌아봤다. 그러나 보고싶은 모습이 보일리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모험가는 조금만 더 걸어가면 성도의 문이 코 앞이었고, 아이메리크는 일을 하러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테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생각을 비웠다. 생각해보니 수배서를 들고 오는 걸 깜박 잊었다. 꼭 이슈가르드만 있는 건 아니니, 다른 도시를 향하자며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도시에 갈 거면 걸어가거나, 초코보를 타고 가는 것 보다는 에테라이트를 쓰는 것이 훨씬 빨랐다. 텔레포를 사용하여 모험가는 순식간에 그리다니아를 향했다.


최근엔 이슈가르드 아니면 모르도나에서 주로 지냈다. 그리다니아나 울다하, 림사 로민사를 향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때문인지 그리다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낯선 풍경에 모험가는 잠시 생각이 멈췄다. 알록달록한 장식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곧바로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붉은 하트의 알록달록한 장식들…….


"발렌티온 초코 준비했어?"

"생각해보니까 발렌티온이더라고~ 완전히 잊고 있어서 가게에서 살까 하고."

"그게 편하지."


지나가는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모험가는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시기가 마침 발렌티온 데이 근처였다.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뮨에게 달려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볼 뻔 했다며 모험가는 웃음을 흘렸다. 그랬으면 아마 이런 이벤트를 잊어버릴 정도로 근처에 사람이 없냐는 소리를 들었겠지. 실제로 사람이 없는 건 맞았지만, 뮨에게 그런 소리를 듣기는 가슴이 아팠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만나지 않는게 아니었기에.


딱히 발렌티온 데이로 표현하는 마음은 연인이나 언약자로 제한되는 건 아니었지만, 주로 연인이나 언약자들끼리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많은 날이었다. 늘 자신과는 먼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모험가는 발렌티온 데이가 있을 때마다 이벤트 장소를 향했다. 먼 일이어도, 이벤트는 즐거우니까. 어떤 이벤트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건 어느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듯 모험가도 똑같았다. 게다가 이 무렵엔 리제트짱에게 의뢰를 받거나 도움을 요청받는 일도 있었으니, 모험가 일적으로 나쁘지 않는 날이었다.


"미케토 야외 음악당인가."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미케토 야외 음악당을 향한 모험가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 문제없이 이벤트는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외 음악당 안으로 들어가자, 모험가를 바라본 리제트짱과 아스트리드가 인사를 건넸다.


"모험가님. 안녕하세요."

"어머, 모험가님이 아닌가요. 안녕하세용. 리제트짱입니다~앙"

"안녕, 리제트짱, 아스트리드. 이번에는 별일 없어보이네?"

"네. 다행히 아무 문제없이 발렌티온 데이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들 무척 즐거워하고 계세요"

"딱히 뭔 일이 있길 바란건 아니었지만, 매번 도와주다가 이번엔 괜찮다고 하니까 좀 허전하네."

"모험가님도 참가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용?"

"……사람이, 아냐. 이건 됐어. 나는 괜찮아."

"마, 만남을 주선해드릴까요? 이전 의뢰인처럼!"

"아니, 아니. 나는 그런 의뢰를 할 생각은 없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만남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서 의뢰한거지, 나는 딱히 그런 만남 바라고있지 않아."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전 발렌티온 데이 때 했던 만남주선을 자신이 당할 것 같자, 모험가는 손까지 내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안그러면 정말 정신차리고보니 누구와 만나고 있었다는 상황이 될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소개받은 사람이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낫지만, 혹시 자신이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모험가는 괜찮다며 다시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아스트리드와 리제트는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는 마음을 접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평소에 전하지 못한 마음이라도 적어보시겠어요?"

"어디다?"

"편지요. 쿠뿌카 쿠뿌에게 편지와 발렌티온 초코를 함께 전해달라고 부탁하면, 답장을 갖고 돌아와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어요."

"오, 좋네 그거. 편지면 평소에 하지 못한 이야기도 적을 수 있고, 발렌티온에 어울리는 이벤트같다."

"그치용? 모험가님도 하나 어떠신가요?"

"새벽 전원에게 보내기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편지를 빨리 써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모험가를 바라보는 아스트리드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모험가를 바라보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고민하고 있는 모험가는 그런 아스트리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제트가 모험가 몰래 아스트리드의 등을 살짝 치며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후. 작은 숨을 내쉬고 아스트리드가 큰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생각에 잠긴 모험가가 놀라 아스트리드를 내려보았다. 자신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까 아스트리드는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정도로 큰 소리를 심장은 낼 수 없어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도, 동료분들 말고 다른 분은 없으신가요?"

"다른 분?"

"예, 모처럼의 발렌티온 데이입니다. 분명, 그, 생각해보면, 아마도, 평소에 마음을 전해보고 싶지만 전하지 못한 그런 분이 계실거예요. 동료분들과는 다른……!"

"아니, 그렇게 말해도."


없다고 말을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눈을 반짝이며 빛내는 아스트리드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전도자로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누구나 한번쯤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 적이 있지 않나. 아스트리드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할 뿐, 무언가를 알고서 말을 건넨건 아닐터였다. 모험가는 그 사실을 이해했지만, 곤란한 것도 사실이었다.


 곤란하다면 그저 적당히 괜찮다고 답을 하면 좋을텐데. 그 어느 답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모험가의 모습을 보며 리제트는 웃었다. 그 모습은 분명 누군가를 생각하는 모습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밀면 그대로 넘어갈 사람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스트리드에겐 조금 어려운 일인 것 같아보였다. 말 뿐만 아니라 확실한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자, 여기용!"


리제트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편지지와 편지봉투와 펜을 모험가에게 건네주었다. 모험가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스트리드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쓰게 웃으며 리제트를 올려다 보았다. 그 미소는 자신에게 향하는 미소였다. 아직 자신은 한참 남은 것 같다는 그런 의미의 미소였다.


아스트리드가 사랑의 전도자로서 부족하다는 걸 깨닫든 말든, 모험가에게는 이 상황은 그저 재난에 가까웠다. 가벼운 마음으로, 평소처럼 곤란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보수를 받자는 생각으로 찾아왔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이벤트는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서 즐기는 것이었다. 적어도 모험가에겐 지금까지 그랬다.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펜을 손에 들고 있었고, 편지지도 들고있었다. 이제와서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모험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누구에게 쓰고, 누구에게 보내는지까진 강제하지 않을테니 원래 하려던 대로 적당히 새벽의 일행 중 한명에게 쓰고 보내면 될터였다. 그런데도 망설이게 되는 건 이것이 기회라는 걸 모험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는 유일 혹은 다신 오지 않을 기회란 것을.


"……그, 답장은 필요없으니까. 보내는 사람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어느새 모험가의 곁으로 다가온 쿠뿌카 쿠뿌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배달이다쿠뽀~"


특이한 형태의 폼폼을 하고 있는 모그리족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모그리족이 무언가를 배달해 오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닌지, 루키아도 경계하는 모습 없이 모그리를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모그리는 감사의 인사를 짧게 하고 망설임 없이 아이메리크를 향해 날아갔다.


"아이메리크 총장님에게로 편지와 발렌티온 초코다쿠뽀~"

"나에게?"


조금 의외였는지 되묻는 아이메리크를 보며 모그리는 망설임 없이 편지와 발렌티온 초코를 꺼내 책상에 두었다. 곧바로 열어도 되는지 물어보는 그의 말에 모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준비해 둔 편지칼로 조심스레 아무런 무늬가 없는 새하얀 편지봉투를 자르고 안에 있는 편지지를 꺼내보았다. 편지 밖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아 편지지를 보면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백지, 로군. 아무래도 잘 못 보낸 것 같다만."

"아니다쿠뽀~ 그 편지로 틀림없다쿠뽀~"

"보내는 사람도 적혀있지 않는데 혹시 누구에게 부탁받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보내는 사람이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쿠뽀~"

"누군가의 장난인걸까요?"


루키아의 말을 듣고 아이메리크는 다시 한 번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발렌티온 초코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낸 거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있지만, 진짜로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간 이 편지와 초코를 보낸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하게 되는 셈이니까.


"확실히 받았네. 배달 감사하군."

"일은 적당히 하고 좋은 발렌티온을 보내길 바란다쿠뽀~"


모그리는 그리 말을 하고 다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누군가 장난을 한 것 같다고 말을 하려는 루키아는 놀라운 모습을 보았다. 백지인 편지를 들고 아이메리크는 웃고 있었다. 마치 누가 보낸 것인이 알아챈 마냥.


"하하, 그래. 그대의 눈엔 내가 일중독으로 보인다하였지."


편지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마 형태로 남는 물건으로 마음을 남기기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어느정도 이해하는 바였다. 말을 뱉으면 사라져버리는 것, 남지 않았다. 그러나 글로 써서 보낸 것은 상대방에게 남게 되어 지울 수도 나중에 수정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모그리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야 말로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원래 쓰고자 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의미로 발렌티온 초코를 보내고, 편지를 보낸 건진 알 수 없었다. 단순한 감사인사 일 수도, 단순한 안부차 보낸 걸 수도, 어쩌면 바로 아까 만났기 때문에 보낸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정말로 발렌티온 이란 것도 모른 채 일만 하고 있을 자신에게 발렌티온 이란 것을 떠올리게 해주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줘서 보냈다는 사실이, 그 마음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어느정도 붙잡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줬으니까.


다음엔 아무렇지 않게 식사에 초대해볼까.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이 일을 꺼내며 보답을 하고자 초대했다고 하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굳이 아무것도 적지 않고, 발신인마저 비밀로 한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랄 그 모습이 눈 앞에 선했다.


아이메리크가 백지인 편지와 발렌티온 초코를 받고 있을 무렵. 모험가는 그리다니아의 여관, 둥지나무의 침대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 적어도 보내려고 했으면 뭔가 간단한 인삿말이라도 적어서 보내야했다고 발버둥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백지라니 오히려 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지만, 보낼 당시에는 뭔가를 쓰는 것보단 차라리 백지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러나 받는 사람이 아이메리크란 사실을 모험가는 잊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장난으로 그런 걸 보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쾅쾅 모험가가 침대를 내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오늘 한 행동은 꽤 오랜 시간 모험가를 괴롭힐 것 같았다.